1933년 9월 6일

진청학원에서 240명 수료식
아동 한글보급, 부인반 운영

 

 

“(전략) 글을 마치며=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동도 있고, 학령 초과로 말미암아 교육과는 남된 아동이 태반인 것이 현하 우리가 보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네들의 글 배워볼 곳은 어디 될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야학이나 서당일 것이다. 그러나 평택지방만은 무산아동의 교육기관인 진청학원이 매년 수백 명의 무산아동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쳐 오다가 금년 봄에 이르러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중략) 지난 五일에 평택계몽운동은 끝을 마치고 六일에는 종업식을 하였는데, 평택 유지 몇 분들도 와주어서 축사도 해주었다. 강사들과 생도들이 서로 헤어지는 날이 되었으므로 아동들은 그냥 계속 해달라고 애원을 하고 울고 늘어지나 할 수 없어 이날은 종업을 하고 내년 계몽운동을 약속하고 강사와 생도들은 눈물로 섭섭히 헤어졌습니다. 더 가르쳐 달라고 울면서 매달리는 여자들을 보내면서 (平澤啓蒙隊 責任者 崔基哲)”(『동아일보』 1933년 9월 16일)

1930년대 초반 <동아일보>는 문맹퇴치를 위한 문자보급 계몽운동을 전국적으로 개최한 바 있다. 1933년 제3회 학생 하기 계몽운동은 대원 총수는 1506명, 강습생은 2만 7352명으로 성황리에 마쳤다.

평택에서도 8월 14일부터 9월 5일까지 20여 일 동안 한글강습회가 개최되었다. 무산아동을 위해 설립된 진청학원마저 문을 닫은 상황에서 한글강습회는 글을 배울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 강습회 책임자는 최기철이며, 강사는 남자 6명, 여자 2명으로 8명이었다.

강습생은 남자 108명, 여자 114명 합계 240명이었다. 강습회 개강 당일에는 참가한 학생이 280명이었으나 종업식에는 240명이 수료증을 받았다. 이외에도 부인 한글반을 별도로 운영하였는데 20명이 참가하였다. 강습회를 한 곳은 평택면 진청학원이었으며, 비용은 평택 유지들이 담당하였다.

한글강습회는 1934년 7월 29일부터 현덕면 운정리 한 농가를 빌려 전개되었지만, 진청학원에서 배운 학생들은 참가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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