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과 우수도 지났건만 금광호수는 꽝꽝 얼어붙은 채 꿈쩍도 않는다. 저 언 호수를 바라보자면 언제 봄이 올까 하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겨울은 제가 겨울인 줄도 모른 채 끝까지 산과 들을 지켜야 한다는 우직함에 빠져 있는 것인가? 겨울이 고집불통으로 버티고 있으니 오던 봄이 발걸음을 주춤하는 것이다. 하지만 봄은 우리 마음보다 발걸음이 더딜 뿐이다. 산개구리가 하천에 내려와 호르르 호르르 울면 그것을 신호 삼아 얼음 녹은 호수의 물빛은 푸르고, 물가의 버드나무 늘어진 가지마다 초록도 짙어질 테다. 한 시인은 종달새의 청아한 소리에서 “반짝이는 울음의 의상(衣裳)”(문태준)을 보았다. 어디 종달새뿐인가! 새벽마다 동박새, 되새, 딱새, 직박구리, 뱁새 등등 온갖 새들이 뜰 안으로 날아와 지저귈 것이다. 봄날 뜰 안은 풍경은 어떤가? 며칠 뜸을 들이다가 홍매화가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고, 살구꽃이 피고, 앵두나무 가지에도 하얀 꽃들이 매달릴 것이다. 이렇듯 생명가진 것들은 이미 완연한 천지간의 봄기운을 느끼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분주하리라. 모란과 작약은 피지 않았어도 봄은 완성된다. 꽃 피고 새가 노래하니, 베갯머리에서 덧없이 천리 꿈이나 꾸던 나도 공연히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도 밝아지는 느낌이다. 봄날에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책을 읽는 일도 버겁다. 멀리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듯 하여 문을 열어보지만 갈 곳이 마땅치 않다. 겨우내 굳게 닫혀 있던 서재의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더니 금쪽같은 햇볕이 서재 바닥에 환한 무늬를 찍는다. 읽던 책에서 눈을 떼고 그 환한 무늬에 오래 눈길을 준다.

지난겨울은 추위로 혹독했다. 추위가 가혹할수록 새 봄에 피는 꽃들의 색깔은 더 선명하고 눈부시다. 봄날에는 연못가에 다소고니 서서 흰 꽃들을 만개한 앵두나무 가지를 오래 들여다볼 일이다. 이것들은 다 어디서 왔는가? 가지를 꺾어 봐도 그 안에는 꽃들이 없었는데…… 삶이 멀리서 오듯 꽃들은 먼 데서 온다. 보람 있는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돌아오는 봄마다 꽃들이 피는 것은 황송하고 고마운 일이다. 꽃들은 내게도 옹색한 가슴을 열어젖히고 “살아라, 살아라”라고 속삭인다. 내가 꽃들이 건네는 말에서 배우는 것은 인종(忍從)의 지혜다. 삶은 살기 위한 것이다. 사는 기쁨을 더 많이 가질수록 잘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이야말로 삶의 본래적 의무에 충실한 것이다.

부끄러움이 많은 젊은 시인은 오는 봄에서 제 안의 죄를 읽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빨리/봄이 오면/죄를 짓고/눈이 밝어//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윤동주, ‘또 태초(太初)의 아침’) 젊은 시인은 봄의 한가운데에서 불현듯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자기다짐이고 이것은 결국 존재의 증가와 자기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청고한 인격의 다짐이다. 꽃들이 만개한 봄날의 뜰 안에 서 있으면 문득 윤동주의 이 시구들이 주는 의미가 또렷해진다. 봄은 이마에 더 많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봄이 오면 대나무를 심고, 매화 몇 주를 사다 심어야겠다. 몇 년 째 지지부진한 책을 이제는 끝내고 의기양양 해야겠다.

강호의 봄이 절정에 이를 때, 봄은 이유 없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고, 기쁨을 두 배로 키워 더 만끽하게 만든다. 봄이 아름다운 것은 생명의 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기쁨과 행복은 두 배로 키워 만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홍매화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보고 아름다움으로 느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자연의 자질이 아니라 인간성의 자질”(베르트랑 베르줄리)이다. 꽃도 그것을 보아줄 사람이 없다면 아름다운 게 아니다.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제비 묻혀오는 하늬바람 위에 혼령 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서정주, ‘봄’) 시인은 꽃피는 봄날에 피가 잘 돌아 생기 충만 속에 있다. 하늬바람은 불고 혼령 있는 하늘은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데 내 안의 이 생기 충만함에서 비롯된 피의 격정을 분출하는 게 마땅치 않다. 천지간에 꽃들은 피고 새들은 짝을 찾아 우는데, 저는 깊은 심심함 속에 있다. 그럴 때 시인은 차라리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고 노래한다. 이 슬픈 일이란 그냥 슬픈 일이 아니라 필경 기쁜 슬픈 일이다. 봄날의 기쁜 슬픈 일이란 것은 연사(戀事)다.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는 구절에는 “사랑할 일이 있어야겠다”는 간절한 바램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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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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