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의 인식 변화와
평택시문화재단, 현장 예술가
이 셋이 균형을 잡고
더욱 절실해져야

 

▲ 이수연 전 부이사장
한국사진작가협회

절실함이란 ‘느낌이나 생각이 뼈저리게 강렬한 상태’ ‘매우 시급하고도 긴요한 상태’를 말한다. 오랫동안 ‘평택의 절실함’은 농촌도시에서 산업도시로의 전환, 인구 증가와 도시 확장에 따른 기반시설 확충 등등 외형적 문제의 해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과 문화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인구감소, 또는 현실적으로 존망에 위협을 받을 만큼 아무것 없는 지자체에서 차라리 이런 것들이 부각되는 이유가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을 모아 활성화해야 산다는 절실함에서였다는 것을 알면 더욱 그렇다. 그런 곳에서는 절실함이 문화나 예술 혹은 축제 등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그렇게라도 먹고살 방법을 찾겠다는 말이고, 평택은 그것 아니어도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그동안 평택예술에 대한 지원이 인근 다른 도시나 그동안 이룬 평택의 다른 분야와 비교해 그다지 나아 보이지 않은 이유는 이렇듯 평택시의 절실함 결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평택 주변의 다른 도시들이 일찌감치 문화재단을 설립해서 운영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인구 60만 명이 되어야 설립 할 수 있다”던 인식, 시설 운영비를 빼면 몇 푼 되지 않는 관련 예산정책을 오래 유지해온 현실, 전담 부서까지 만들어서 대표 축제를 개발한다고 오랫동안 추진해왔어도, 축제가 끝나면 뒷말이 무성한 것 등에서 보듯 절실하게 방법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은 비겁한 변명이지만, 이처럼 행정 쪽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정책의 우선순위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길을 뚫고 건물을 세우고 공장을 유치하는 데에는 막대한 세금을 투입하는 것이 당연한데 문화나 예술에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게 절실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문화예술의 가장 큰 주주는 예술가나 시민이 아니다. ‘돈줄’을 쥔 행정부다. 이는 평택만의 문제나 우리나라만의 현실도 아니다. 덜하고 더하고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만국 공통이다. 문화 발전과 축적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투자가 시간을 단축한다. 그 투자의 현실적 주체가 행정부라는 말이다. 물론 투자를 요구하거나 장려토록 하지 못한 예술가들의 절실함 부족도 큰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3년 전, 평택시민 200명을 모아 진행한 원탁토론에서 나온 결과가 아주 뜻밖이었다. 많은 현안을 제치고 우리 시에서 가장 시급한 게 문화예술 인프라 구축이라고 했다. ‘인프라’라는 단정적 표현에 100퍼센트 동의하지 않지만, 시민들은 ‘이제 먹고사는 게 절박한 시대’가 지났다는 표현을 한 것이고, 거기에 진하게 동감한다. 그들이 말한 ‘인프라’는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이든 정신적인 풍요의 충족이 매우 시급하고 긴요한 상태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올해 우리에게도 문화재단이 생겼다. 예술에 오래 종사한 입장에서 이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싶다, 출범 초기인데도 예산의 씀씀이가 과거보다 커졌고 ‘이런 용도’로도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반갑기만 하다. 그러나 재단이 생겼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재단이 없어서가 아니었지 않은가.

전통적으로 솥은 세 다리를 가지고 있다. 균형을 잡으라는 의미다. 두 개는 마련했다. 문화재단을 만든 평택시의 작은 인식 변화가 그 하나다. 변화를 실질적으로 지역에 펼칠 문화재단은 그 둘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다리는 평택예총을 포함한 평택의 현장 예술가들 몫이다. 그 셋이 시민들의 절실한 요구를 해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그런데도 혹자는 문화재단이 기존 예술계의 옥상옥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과 구성원의 면면에서, 평택 현실에 덜 해박한 것을 우려한다. 하지만 기대가 더 큰 것 또한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하나만으로 욕구를 해결하기에 역부족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 셋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균형을 잡되 그게 무엇이 됐건 절실해져야 한다. 그래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뉴노멀, 새로운 일상, 모든 것을 삼키는 코로나19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평택예술이 되는 길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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