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5월 19일

7살에 헤어진 어머니 20년간 찾아다녀
승려 되어 전국 헤매, 모친과 또 헤어져

 

 

“일곱 살에 잃은 어머니를 스물두 해나 지난 오늘에 기어코 찾아보려는 순진한 효성, 그 방편으로는 머리를 깎고 남의 집이라도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중노릇을 하면서 八도강산을 두루두루 돌아 필경 二十二년 만에 몽매에 그리던 어머니를 찾은 소설 같은 사실이 있다.

진위군 부용면 근내리振威郡 芙蓉面 近乃里 五十번지에 사는 정상근鄭相根(29)은 나이 일곱 살 먹던 해 그 부친이 세상을 떠나게 됨에 그 모친 한영순韓永順(49)은 그 남편이 죽은 이듬해 홀연히 집을 떠나 어디로인지 가버렸다. 八세의 어린 상근相根은 버리고 간 어머니가 그리웠으나 돌아오지 않으므로 마침내 자기도 집을 떠나 그 어머니를 찾을 양으로 나섰다 한다. 어린 상근相根은 의지 없이 돌아다니다가 한 노승에게 구함을 받아 이천利川 부악사富岳寺에 자리를 정하고 4년간 불교를 공부하다가 또 다시 그 노승과 함께 부악사富岳寺를 작별하고 자기 一생에 그 모친을 찾아볼 결심으로 조선 十三도를 순례하며 가가호호를 차례로 역방하니 세월은 흘러서 어느덧 八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마침내 자기가 의지하고 다니었던 노승도 상근의 모친을 찾아주지 못하고 가야 하는 저승의 길을 밟게 되니, 이때 상근은 十六세인지라. 부모 이상으로 여기었던 그 노승조차 잃게 되자 의지할 곳 없이 거리에 방황하다가 할 일 없이 자기를 낳아준 고향으로 돌아오니, 때마침 들려주는 소식은 자기가 찾으려던 어머니가 장단長湍 어느 곳에 있다는 풍문을 듣게 되었다. 十七세의 상근은 방랑에서 돌아온 그 발길을 다시 돌이켜 장단을 찾아 유랑하다가 다다른 곳이 장단군 대남면 장좌리長湍郡 大南面 長佐里 김경성金京城(49)의 집이라. 문 앞에서 노는 소녀에게 말을 물으니, 안에서 ‘진위’라는 말에 유의하게 듣다가 마침내 쫓아 나온 그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한다. 九년 간 그립던 모자가 만나 만난 정화를 한없이 풀게 된 후 함께 고향으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김경성金京城에게로 개가하여 九년 동안 아들과 딸을 낳고 별 고생 없이 사는 고로, 같이 오지 못하고 후일에 가기를 언약하고 할 수 없이 또다시 그 어머니를 작별하고 혼자 돌아오게 되었다 한다.

그 후로 종종 서신 왕복이 있었으나 一년이 지나고 二년이 지남에 종래 소식이 없으므로 다시 그 곳을 찾아가 동리 사람에게 물으니 얼마 전에 그 모친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며 집으로 돌아와 이후 二년간 그 모친의 거상을 입기까지 하였던 바, 작년에 그 모친이 또다시 살아있다는 풍문이 들리게 되므로, 그는 반가운 마음에 그곳을 찾아가 장단 대남주재소長湍 大南駐在所를 방문하고 자세히 물어본 결과, 과연 김경성이 있으므로 그를 불러 조사한 결과, 그 모친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을 알게 되며 얼마 전에야 二十년 만에 비로소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다.

二十년 간 그리워하던 모친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와 지내기를 몇 개월이 못 되어 그 모친은 二十년 만에 만난 그 아들도 그리울 뿐더러 개가하여서 낳은 아들과 딸도 보고 싶어 견디지 못할 처지이던 바, 얼마 전에 개가하여 가서 낳은 전기 김경성의 아들이 와서 어디로인지 그 모친을 데리고 갔다 하여, 二十二년 만에 찾아놓은 그 모친을 또다시 잃어버린 정상근은 방금 그 모친의 거처를 찾는 중이라 한다.”(『동아일보』 1933년 5월 19일)

 

<평택시사신문> 연재 ‘그때 그 시절 평택은’이 독자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300회로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2014년 1월 시작한 이후 지난 7년여 동안 서민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사건사고를 접하며 함께 울고 웃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지면에 게재된 이 사료들이 평택의 귀중한 역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합니다. 평택의 지역사 발굴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준 성주현 교수께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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