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만큼은
전통에 구애받지 말자
가정마다 현실에 맞게
조상을 기리면 된다

 

 
▲ 박준서 연구위원
평택문화원 향토사연구소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명대사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고뇌만큼 이번 추석이 던지는 무거운 질문이다. 정부가 오는 추석 연휴기간 고향 방문·성묘를 자제해 달라고 지난 9월 6일 밝혔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현재의 추세로는 3주 뒤인 추석까지 코로나19 무증상, 잠복감염을 완전히 통제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라며 “전국적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추석 연휴기간에 가급적 고향방문과 성묘를 자제할 것을 권고한다”고 했다. 연중 두 번 겪는 ‘민족대이동’은 힘들긴 해도 낭만과 추억이 서려 있다. 한데 이번 추석은 낭만을 찾고 추억을 더듬는 고향나들이가 아닌 삶과 고통의 기로에 있다. 이번 추석은 너무 극단적인 표현 같지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가 아니라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이다.

어느 나라든지 근대화에 따라 외형적 삶의 모습은 변하지만, 관습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국사회에는 유교적 생활관습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종교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다수가 자신의 종교 신앙과 관계없이 관혼상제 같은 일상적인 의식과 행위에서는 유교적 생활관습에 많이 젖어 있다고 한다.

종교로서의 가치보다는 윤리 중심적 유교의 도덕규범 가운데 가장 중요한 2가지 덕목으로 ‘충忠’과 ‘효孝’가 있다. 충은 원래 자기와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 대해 마음을 다하는 정신자세를 의미하는 개념이었으며, 효는 처음부터 자식의 부모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의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그 후 충의 개념이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뀜에 따라 충과 효를 상호 연계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부모의 은혜를 기리며 그 은혜에 보답하는 효 정신을 국가의 존립과 사회의 안정질서, 가족 간의 화목을 만들어 가는 최소한의 기본법이요, 인륜적인 사상으로 여겼다. 우리가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까닭은 효를 계속하기 위함이며, 효란 자기존재에 대한 보답이다. 그래서 제 의례는 근본에 보답하는 의례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조상은 극진히 받들면서 그 조상이 돌아가셨다고 잊어버려 박하게 한다면 심히 옳지 못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우리 사회는 지난 5월 어린이날과 8월 광복절 연휴에 코로나19 확진환자가 급증하고 결국에는 거리두기가 격상되는 후유증을 앓았다. 더구나 이번 추석은 연휴가 닷새나 된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됨에 자영업자나 소상공인들, 특수고용직 종사자들은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죽은 사람 챙기다 산 사람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심란하기 그지없다.

맹자는 “누구를 섬기는 것이 가장 소중한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무엇을 지키는 것이 가장 소중한가? 자신을 올바로 지키는 것이 소중하다. 자신을 올바르게 지키고서 자기 어버이까지 잘 섬겼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자신도 올바르게 지키지 못하고서 자기 어버이를 잘 섬겼다는 얘기는 이제껏 듣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자기 몸을 지키는 수신을 강조한 말이다.

효도하러 고향 갔다가 행여 어르신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는 불효를 저지를 수도 있으며 거꾸로 고향에서 좁은 공간에서의 밀집 접촉으로 병을 옮을 수도 있다. 조선 시대에도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특수한 사정이 있으면 추석 차례를 건너뛰거나 불참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았다. 가족이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한자리에 모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안 모이는 게 합당하다. 집안 사정에 따라 결정하되 건너뛴다고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느냐는 문제가 남지만, 부모님이 오시는 것도, 내가 가는 것도 이번만큼은 전통에 구애받지 말자.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는 것도 좋지만 산 자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유학은 어떤 신을 모시는 학문이 아니다. 가정마다 현실에 맞게 조상을 기리면 된다.

‘예禮’란, 고정불변의 절차적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대 상황적이다. 자기만의 고정적 틀에 박히면 실수를 범하게 된다. ‘예禮’란, 사회를 지배하는 도덕적 질서이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상식의 근원이다. 시대 상황에 맞게 물 흐르듯 따르는 것이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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