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시 포승읍 홍원1리는 홍원리의 바깥쪽에 있다고 해서 ‘외원’이라고 불렀습니다. 홍원2리는 조선시대 말을 기르던 곳이 있었다고 해서 ‘마장’이라고 불렀고 ‘원마장’은 가장 먼저 생겼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홍원3리는 ‘자오’라고 불렀습니다. 마을에 집을 지으면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집을 지었는데 이것을 풍수상 ‘자좌오향子坐午向’이라고 했고 그것을 줄여 ‘자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홍원리의 넓은 농지 사이 한 농로에는 ‘연백꿈길’이라는 도로명주소가 있습니다. ‘연백’은 황해도 연백군을 뜻하는데 거기에 ‘꿈길’이라니 그 의미가 자못 궁금해집니다. 

몇 달 전부터 포승읍 홍원리 마을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매 주말마다 이 마을 어르신들을 인터뷰를 하면서 어르신들이 살아온 삶과 마을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그중에서도 인터뷰를 시작할 당시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듣게 된 ‘연백꿈길’이라는 도로명주소는 줄곧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인터뷰 횟수가 늘어나고 점점 마을의 역사를 알고 나니 그 길에 얽힌 아픔과 회한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같은 평택에서 살아가면서도 이 마을의 역사는 왜 까마득히 몰랐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들이 미처 관심 갖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연백군에 거주하던 마을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강화도로 피난을 왔습니다. 금방 고향으로 갈 거라고 생각하고 강화도 교동에서 임시로 거주하는 동안 휴전이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고향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임시로 거주했던 강화도에서도 살아갈 길이 막막해지자 사람들은 당시 남한 정부로부터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면 그 땅을 분할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평택으로 내려와 간척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홍원리입니다.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정작 바다를 막아 육지를 만드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전쟁 직후, 미군의 원조로 강냉이가루와 옥수수가루를 배급받아 죽을 쑤어 먹으면서 그들은 삽과 지게를 이용해 산 흙을 퍼서 날랐고 돌멩이를 져 나르며 출렁이는 바닷물을 막았습니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도전을 거듭했던 피난민들은 결국 바다를 막았고 그토록 원하던 농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닷물에 잠겨 있던 농토에서 짠물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도 겪어야 했지만 그래도 내 땅이 생겼다는 뿌듯함과 이곳에서 정착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습니다. 

매일 삶을 이어가야 했기에 땅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향을 잃고 낯선 타지에서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야 했던 가장의 마음이나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 어린 나이에도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장남과 장녀의 마음을 지금은 아마 백분의 일도 헤아리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증언을 듣는 우리는 이내 숙연해지고 맙니다. 

넓은 농토를 가로지르는 농로가 ‘연백꿈길’이라는 도로명주소를 얻게 된 것은 그분들의 간절한 꿈이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그 꿈길은 고향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길이며, 고통과 회한과 눈물이 얼룩진 아픔의 길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해냈다는 커다란 자부심이 담긴 승리의 길, 그 길이 바로 포승읍 홍원리의 ‘연백꿈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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