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평동 표석세우기 사업으로
원평동 역사가 되살아나고
‘훌륭한 근대역사’ ‘훌륭한 전통’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기억記憶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 김해규 소장
평택인문연구소

명절에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는 것은 조상의 은혜와 가르침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제사를 지내는 목적도 마찬가지다. 나我라는 존재가 스스로 나서 자란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를 입고 성장했음을 깨닫기 위함이다. 깨달음은 가슴 뭉클한 감사함과 진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왜 그걸 몰랐을까 하는 후회와 회한도 밀려든다. 그렇게 깨달은 것을 잊지 않고 되새김질해 삶의 다양한 혈관으로 흘러 보내는 것이 제사다.

기억記憶의 다른 이름은 ‘그리움’이다. 나는 할아버지가 만든 ‘돌절구통’과 아버지가 사용했던 ‘침針’을 유품으로 소장하고 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는 조선 말기에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에 신식학문을 배우고 경찰이 됐다. 충청도 공주에서 경찰생활을 했는데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발해서 의병전쟁이 확산할 때여서 공주경찰서에도 의병들이 많이 잡혀 왔다. 그 의병들을 일본 헌병들이 고문하고 사살하는 것을 참다못한 할아버지는 경찰복을 벗어 던지고 의병에 투신했다가 일제강점기 내내 호적도 없이 쫓겨 다녔다. 쫓겨 다니는 동안 호구지책으로 배운 기술이 석공예였다. 돌절구통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할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원망하며 평생을 살았다. 호적도 없이 쫓겨다니다보니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고 해방 후에는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평생 허리 한 번 펴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가 침針 놓는 기술을 익혔다.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순전히 어깨 넘어 눈썰미로 배운 기술이었다. 그래도 의료혜택을 받기 힘들었던 시골동네에서 침쟁이 아버지의 기술은 요긴하게 쓰였다. 경기하던 아이도 살렸고 중풍 왔던 사람도 아버지의 침針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그것으로 아버지는 마을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존재감을 나타냈다. 지금도 시골집 울안에 놓인 돌절구통은 돌아가신 지 60년도 넘는 할아버지와 나를 연결해주는 스타게이트다. 아버지의 침針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것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을 기억하고 반추한다. 내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지난해 원평동행정복지센터와 함께 ‘원평동 근대문화유산 표석세우기 사업’을 진행했다. 평택지역 근대近代의 출발점인 원평동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밝히고, 평택역, 평택군청, 평택경찰서, 평택세무서, 평택우체국, 평택읍사무소와 같은 근대문화유산에 동판 표석을 설치하는 사업이었다. 지난해의 연구로 30여 곳의 근대문화유적을 밝혀내고,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으며, 여섯 곳의 근대문화유산에 동판을 설치했다. 시민에게 근대문화유산지도와 원평동 역사팸플릿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올해는 좀 더 많은 동판을 설치해 원평동 골목골목에 생생한 역사적 스토리를 덧입히려고 한다.

원평동은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 쇄락할 대로 쇄락해 한 때는 ‘둑너머’라고 불렸다. 1986년 평택시가 승격되면서는 ‘서부동’이라고 했다. 뉴욕의 할렘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낙후된 동네, 존중받지 못하는 동네처럼 여겨졌다. 이번 사업은 원평동이 ‘가난하고 낙후된 동네’가 아니라, ‘근대역사의 뿌리를 간직한 전통 있는 마을’이라는 전통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가난한 이들이 살았던 골목이 일제강점기 평택지역 최고의 번화가였고, 정치와 행정, 상업의 메카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게 하는 사업이다. 작은 몇 개의 동판 표석일 뿐이지만 이것으로 원평동의 역사가 되살아나고 평택시민들에게는 우리에게도 ‘훌륭한 근대역사’, ‘훌륭한 전통’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기억記憶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로마’도 누군가가 관심 갖고 발굴해 드러내지 않았다면 오늘날처럼 역사문화도시가 될 수 없었다. 우리도 그렇다.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