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선지 위에 펼친 공점산수(空點山水)의 신세계

5년마다 개인전, 매번 새로운 작품 선보여
기존의 관습 비워낸 곳 새로운 것 채워 넣어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며 작품을 제작하는 활동을 말한다. 이는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 장르를 불문하고 적용되는 것으로 아름다움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일은 예술가의 가장 근본이 되는 정신이자 사명인 셈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늘 보던 것들의 이면에서 낯설음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숙명이라 할 수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작품들
“여백을 중시하는 동양화에서는 대부분 여백을 흰색으로 표현해 내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첫 전시에서 흰색이 아닌 검은색 화선지를 선택해 검은 여백을 만들어냈지요. 흰색은 빛을 반사하는 색인데 반해 검은 색은 빛을 흡수하는 색이니까요. 우리나라 역사의 아픔을 아우르고 삶의 상처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동양화의 여백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한상호(55) 작가는 1989년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인사동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검은색 화선지에 표백제를 사용해 탈색하고 수간채색을 활용한 그의 작품은 ‘하늘과 땅’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구상과 비구상의 중간 선상에 놓여있다. 어둡지만 마치 동굴 속에서 빛나는 고대 유적을 만난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존재감을 드러내던 그의 작품들은 당시 평론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으기도 했다.
“첫 번째 작품전시를 하고 난 뒤 스스로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본질에 대한 물음, 예술 작품이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결국 개인의 넋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자괴감, 민중의 삶을 외면하는 것이 예술인가 하는것에 대한 생각들이 절 끊임없이 괴롭혔거든요”
한상호 작가는 이후 버려진 밥상을 주워 그 위에 화선지를 입히고 먹과 채색을 통해 어두운 도시의 이면들을 그려내기에 이른다. 도시의 야경에서 실루엣으로 비춰지는 잔영에 인간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그의 생각들은 ‘버려진 밥상’이라는 색다른 오브제를 화면으로 사용함으로써 내면의 고뇌를 작품으로 표현해냈던 것이다.

과거는 현재를 밀고 가는 힘
“중학교 때 처음 화랑이라는 곳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인상파 화가가 그린 장미 그림을 보았습니다.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받았었지요. 고등학교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대학에서도 동양화를 전공해 지금까지 꾸준히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한상호 작가는 서울 영동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17년을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열정은 더 이상 그를 교사로서의 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전업 작가로서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고.
“대학 시절 데모하다 잡혀가서 고문을 받은 후 왼쪽 귀만 완전히 들리지 않고 오른쪽 귀는 희미하게 들리는 장애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당시에도 전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그런 것쯤은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그림에 대한 열정이 간절했고 지금은 그때의 바람처럼 그림을 그릴 수는 있으니 작품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붓는다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없지요”
그는 첫 전시 이후 5년 마다 열었던 전시회에서 매번 새로운 작품들을 대중 앞에 선보였다. 작가로서 항상 새로운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사명감은 실경산수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도 비주류로 활동하며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동양화를 선보일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고.

공점산수(空點山水)로 진화하다
“그동안의 작품들은 딱히 나만의 색깔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 끝에 제가 평생을 파고들만한 소재를 공점산수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화선지와 먹이 가장 조화롭게 표현해 낼 수 있고 또한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산수거든요. 하지만 천 년 이상을 이어온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기 보다는 제 나름대로 재해석해 새로운 산수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공점산수’는 동양화의 기본이 되는 기존의 ‘선’을 분해해 ‘점’으로 표현하고 동양화에서는 금기시 되는 오방색을 사용해 표현해내는 한상호 작가의 새로운 기법이다. 본질을 이어받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자 하는 그의 신념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산수로 재창조 된 셈이다. 수많은 점들로 표현된 그의 작품 속 산과 계곡, 구름들은 그래서 더욱 독특하고 신비로워 프랑스 파리 전시에서는 미술 애호가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많은 작품들이 팔리기도 했다.
“예전 관습대로 그려온 산수를 그리고 싶어 몸살이 날 때도 있지만 기존의 것들을 비워내야만 새로운 것들을 채워 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동안은 많은 것들을 비워내는 작업들을 해 왔습니다. 빈 것을 채우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앞으로 또 어떻게 변화할지도 잘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제 작품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변화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한상호 작가는 오는 10월 인사동에서 또 한 번의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나날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한상호 작가, 모든 것은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진리를 일찍이 체득하고 이제는 깊이를 추구하는 그가 오는 10월 우리 앞에 어떤 작품들을 선보이게 될지 못내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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