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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평택의 3·1운동을 되새기다
임봄 기자  |  foxan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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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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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우리가 기억해야할
평택의 독립운동가 3인의 삶

올해는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2주년이 되는 해이다. 수원 이남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9일 평택에서 시작해 안성과 화성, 천안 등 남한의 3대 항쟁지로 퍼져나갔던 만큼 평택은 경기남부 3·1만세운동의 중심에 있다. 
평택의 3·1만세운동은 3월 9일 현덕면 계두봉과 옥녀봉, 마안산 일대에서 시작되어 4월 중순까지 평택 전 지역에서 전개되었으며 농민, 학생, 상인, 여성, 공무원 등 각계각층에서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3000여 명이 참여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평택지역의 대규모 만세운동을 “가장 광포狂暴한 3·1만세운동”이라고 평가했으며, 그만큼 큰 희생도 뒤따랐다. 평택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격렬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훌륭한 독립운동가도 많지만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희생된 민초 독립운동가들도 무수히 많다.
<평택시사신문>은 3·1독립만세운동 102주년을 맞아 평택시민이 꼭 기억해야 할 평택의 독립운동가 3인을 집중조명 함으로써 평택의 독립만세운동의 의의를 되새기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3·1운동 102주년,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 집중조명
안재홍·원심창·이석영, 평택 빛낸 독립운동가 3人3生

 

‘다사리’를 외쳤던 민족지도자 안재홍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3년은 우리나라에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학문적인 깊이를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통합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 민세 안재홍이다. 안재홍은 1891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거쳐 만 19세인 1910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했고 이 무렵 동경을 방문한 이승만과 만나 인연을 맺었다. 

안재홍은 중국의 독립운동가들에 관심을 갖고 중국으로 망명해 신규식의 동제사에 가담했다. 23세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곧바로 귀국해 중앙학교 학감으로 부임한 후 후진양성에 힘썼다. 3·1운동 직후 결성된 비밀조직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총무로 선출됐다가 발각돼 징역 3년을 받았고, 이후 해방되기까지 21년 동안 안재홍은 비타협적인 항일민족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조선일보 주필이자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항일 논설을 실었고 그의 논설들은 명문장으로 칭송되었다. 백남운, 홍명희, 조병옥 등과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했으며 이상재, 조병옥 등과는 태평양문제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민족운동의 발판이 될 기관을 만들었다. 신간회 총무로 활약하면서 이로 인해 일곱 차례나 더 투옥되기도 했다. 

국사학자이기도 했던 안재홍은 틈틈이 조선사에 관한 저술활동을 벌였으며, 8차 옥고를 마친 뒤인 1940년 이후에는 고향인 평택에 은거하며 조선상고사에 관한 저술을 계속했고 조선통사에 관한 저술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조선어학회사건으로 9차 투옥을 겪었다. 일제 치하에서의 옥중생활은 모두 7년 3개월이었다. 1943년 출감한 후에도 여운형과 함께 민족자주, 호양협력, 마찰방지의 3원칙을 제시하며 일제에 응수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당시 54세였던 안재홍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참여했다. 위원장을 대신해 ‘해내 해외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 무렵 안재홍은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출간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기존의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말고 민족의 구성원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정신 아래 초계급적인 통합 민족국가를 건설하자”고 제의했다. 

그의 신국가건설론은 그의 ‘다사리 이론’으로 정립되는데 “모든 사람이 모두 제 말을 하고 모든 사람이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순수한 옛 우리말인 ‘다사리’로 표현했다. 

1945년 9월 국민당을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그 정당에서 급좌 급우를 모두 배격하고 국력을 통합하여 신민주주의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1946년 1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안재홍은 좌우가 협조하여 미소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리게 하는 좌우합작운동에 가담했고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면서 통합정부 수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자 단독정부 수립을 수용하게 되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9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납북되었다. 1965년 75세가 되던 해 평양에서 별세했다. 일관된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의 지도자 안재홍은 1989년 정부로부터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아나키스트 항일 독립운동가 원심창

   
 

평택 출신 독립운동가 원심창 의사는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출신의 아나키스트 항일 독립운동가로 상해 육삼정 의거의 주역이자 재일본민단의 창립자이다. 1918년 평택성동초등학교의 전신인 평택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에는 3·1만세운동의 연장으로 4월 1일 평택역 3·1만세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 상경하여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일제의 식민지 차별교육에 대항해 학생들의 수업 거부 등을 주도했으며, ‘흑우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졸업 후인 1923년 일본으로 유학해 니혼대학 사회과에 입학했으나 학비 문제로 자퇴했다. 원심창 의사는 아나키스트 최초의 노동조합인 동흥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무정부주의 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북경, 상해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포들을 설득했다. 1926년, 이 사상을 구체적으로 전파하고 무정부주의 실천을 위한 행동기관지로 <흑우> 제2호를 발간하고 홍보했으며, 1928년까지 흑풍회와 흑우연맹을 결사하면서 무정부주의 사회실현 운동을 계속했다. 1929년에는 일본 동경유학생학우회의 이른바 폭력행위 사건으로 3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1931년 상해에서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더 강화했고, 같은 해 6월 흑색공포단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원심창 의사를 떠올릴 때 가장 주목하는 활동은 ‘육삼정의거’이다. 1933년 3월 1일 원심창 의사는 항일선전문을 등사해 상해지역에 거주하는 한국동포에게 배포하고 선전했는데 이때 흑색공포단 단원과 회합하고 주중일본공사가 장개석의 만주포기, 열하지방 대일무저항주의를 책동하는 음모문제 폭로와 이를 저지시키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게 된다. 

논의 결과 그해 3월 17일 주중일본공사를 폭살시킬 목적으로 중국 상해 공동조계 무창로에 있는 육삼정 부근의 중국요리점 송강춘에서 일행의 통과를 기다리던 중 일본 첩자의 밀고로 일행이 모두 잡혔다. 원심창은 1933년 일본 나가사키지방재판소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일본 소재 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5년 징역 20년으로 변경되면서 12년 6개월의 복역을 마치고 출옥했다. 그리고 잠시 고향인 평택에서 휴식을 한 후 1946년 신조선건설동맹을 창설하고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원심창은 1951년 민단중앙단장, 1953년에는 조국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대표위원겸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1959년에는 계몽지 <통일조선신문>을 창간해 재일동포들의 조국 통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한국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본부를 결성하여 대표위원에 피선됐다. 

원심창 의사의 육삼정의거는 비록 사전에 계획을 눈치 챈 일본 측에 의해 실패했지만 이 암살계획을 통해 당시 일제와 장개석이 맺은 밀약인 만주 포기계획이 세상에 알려졌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과 민중들의 시위가 격화되면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수 있었다. 

원심창 의사는 해방 이후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남과 북으로 갈린 좌우익의 화합을 강조했고 남북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다양한 대외활동을 했다. 재일동포로는 처음으로 의사義士 칭호를 받았고,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석영

 

   
 

이석영은 이회영, 이시영 등 경주이씨 6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만주에서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고 말년에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이석영과 평택의 인연은 그가 양자로 입양되면서 양아버지 이유원의 재산이 평택에도 있었고 그 재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데 있다.

이석영은 1855년에 태어났다. 삼한갑족 집안으로 부와 권력을 동시에 누렸던 집안이지만 일제가 군림하자 모든 부와 권력을 포기하고 6형제가 모두 가족들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자리 잡았다. 당시 이상재는 이 소식을 듣고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와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라고 칭송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탐한 친일 매국노가 있는가 하면 조선의 독립과 광복에 모든 것을 바친 애국지사도 있다. 그러나 그 애국지사 중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 6형제는 독립운동의 최고 가문으로 손꼽힌다. 

이석영은 평택시 진위면 가곡리를 비롯해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전답과 가산을 모두 매각해 당시 쌀값 기준으로 현금 40만원을 마련해 해외독립운동에 사용했다. 백사 이항복의 10세손인 이석영은 이유승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조선말기 영의정을 지낸 집안어른 이유원에게 입양됐다. 이유원의 재산은 남양주에서 서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왕래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갑부였고, 이석영은 이런 양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다. 

21세에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지냈지만 벼슬을 모두 물리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석영을 비롯한 6형제와 일가족은 영하 30도를 맴도는 강추위 속에서도 마차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서간도 추가가로 망명했다. 거금을 들여 토지를 확보하고 이곳에 모인 항일지사들은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만주 일대 한국인 혁명 결사의 개시이며, 이주한인들의 단결과 자치를 도모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는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과를 두어 운영했고, 이석영은 이사장인 교주로 학교운영을 맡으면서 이곳에 찾아오는 독립운동가의 생활을 책임지거나 독립자금을 대는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3500여명의 독립군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청산리대첩 등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는 동안 이석영의 재산도 바닥을 드러냈고 말년에는 곤궁함이 절정에 달했다. 가산은 탕진되고 일제의 세력은 만주에까지 뻗쳐서 항일지사들도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큰아들 규준은 독립운동 진영에 피해를 주는 자들을 체포하거나 암살하는 ‘다물단’ 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암살되었다. 고령에는 병을 얻어 중태에 빠졌으나 국내에 와서 치료를 받은 후에는 다시 상해로 돌아가 상해 뒷골목에서 두부 비지로 연명하다가 사망해 연고를 찾지 못하는 이들을 묻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우리나라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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