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나는 
이 세상에서 보기드믄 
숙명적인 친구이자 
아름다운 인간관계

 

 

▲ 김찬규 상임공동대표
평택항수호범시민
운동본부

평택시 발전을 위한 모든 분야에서 평생을 함께 동고동락 했던 이주상, 내 친구여! 이 어찌 청천 하늘의 날벼락 같은 부음인가! 2021년 3월 28일 부음을 듣기 며칠 전인 3월 25일에도 평택항되찾기범시민운동본부 사무실에서 이동훈 평택시발전협의회장과 함께 모여서 평택항 신생매립지를 당진시와 아산시에서 찾아온 이후의 평택시 대책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았던가! 생생한 모습으로 점심 식사까지 함께 하지 않았던가!

불가에서 말하기를 인생살이는 우주만물의 윤회 성상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고들 말하지. 흔히들 인생이란 덧없고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대는 우리 평택시 발전정책 개발을 위해 10여년은 더 살아서 함께 봉사 할 수 있으리라 진정 기대하였네. 친구와 나는 이 세상에서 보기드믄 숙명적인 친구이자 아름다운 인간관계였음을 회고하는 바이네.

우리의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인간관계는 1956년도 안중중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되었지. 유세준 교장선생님, 정시우 교감선생님으로부터 아침 조회시간마다 애국심과 민족 주체성 확립으로 유능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적이고 우렁찬 훈화가 우리의 인생철학을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네. 

우리는 두 분 선생님의 아침조회 훈화에 감격되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공동명의로 편지를 보냈던 용기 있고 감격스러운 기억도 있네. “대통령 각하! 우리 백성들의 비참하게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여주시고, 정부 관료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막아주시고, 모든 백성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주십시오”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고 기억하네. 아마도 우리가 소년 시절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던 듯한데, 이제는 누구와 옛날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슬픔이 앞서네.

세월이 흐르고 대학교 졸업반이던 시절, 우리는 서울에서 만나 다시 의기투합을 했지. 서울에서 이문재 전 평택시 기획실장, 고. 신지수 등 네 명이 수차례 회동하면서 “우리가 이제 최고학부 출신 청년이 되었으니 우리의 젊은 꿈을 고향인 평택에서 펼쳐나가자”고 의견을 모았지. 

제일먼저 평택 서부 4개면 농촌지역 청년 동지들을 규합하고 빈농에서 태어나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을 모집해 중학교 과정을 가르쳐 농촌계몽 운동을 하자는데 동의하고 428명의 청년동지를 규합해 1966년도에 ‘청록회’라는 단체를 창립하게 되었지. 

‘청록회’ 임원들이 주축이 되어 제일 먼저 현재 포승중학교 자리에 ‘포승상록재건학교’를 설립해 운영했고, 이어서 현덕재건학교, 태삼재건학교를 설립해서 중등 교육과정을 운영했는데 사실은 이주상 그대가 제일 선두에 서서 추진했던 아름다운 청년시절이 지금도 생생하네. 

그 후 우리는 우리의 뜻을 좀 더 넓혀 평택군 전역을 위해서 일해보자는 뜻을 모아 군청 소재인 평택읍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지. 평택군의 문화 역사 조직체를 살펴보니 문화원이 잠시 존재하다가 무산된 사실을 알고 평택문화원 창립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었지. 당시 무산된 평택문화원 조직원으로 활약했던 평택읍 유력 지도층으로 ‘세원세점’을 경영하던 장순영 씨와 김항권·조경행 씨 등 7~8명의 어른들로부터 자문을 받아 대한통운 평택역 영업소장을 하던 조경행 씨를 평택문화원장으로 추대해 다시 창립했던 것은 현재 평택문화원의 시발이 되었으니 큰 보람으로 기억하고 싶네.

당시 평택군은 이웃 시·군에 비해 문화유산과 역사유산이 빈약한 상황지만 문화원이 창립됨으로써 오늘날 평택시의 문화 역사가 체계화되고 장족의 발전을 거두는 기초가 되었으니 후예들에게도 귀감이 될 것이라 기대하네. 이후 그대는 문화원장으로 취임해 평택문화원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했고 지금은 타 시·군 어느 문화원보다도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으니 평택시민의 자부심과 긍지가 더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이후 친구와 나는 공교롭게도 집권정당의 핵심 간부직에 있으면서 소년시절의 꿈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고, 모든 사회분야가 낙후 되어있던 평택군을 근대화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도 명예로운 역사로 남지 않겠나. 

평택군 방방곡곡이 도로가 취약했을 때 교량 설치문제, 농촌마을 진입로 사리부설,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정책개발, 방방곡곡 농촌마을 도로포장 등등 평택지역사회의 근대화 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니 우리의 인생이 그래도 보람 있었지 않았나 생각하네. 

내 인생에 가장 가까웠던 고 이주상, 내 친구여!

그대가 정당에 기여한 공로로 평택농지개량조합장에 취임해 소년시절의 꿈이었던 농촌문화 복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것도 친구로서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네!

친구는 1994년 지방자치가 실시되기 직전에 평택군수 출마 준비를 하고 있었지. 당시 지역여론은 무조건 당선된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3개 시·군 각 지도층 인사들은 장차 지방자치가 실시되면 전국 각 시·군 간에 경쟁력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했었네.

3개 시·군 통합의 당위성은 첫째 영토가 넓어야 하고, 둘째는 인구가 많아야 하고, 셋째는 전국 시·군 간에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3개 시·군을 다시 통합하여야 한다는 대 전제 아래 통합을 추진했지. 그 과정에서 이주상 그대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국회의원이 다수지도층 인사 앞에서 통합 시 시장 공천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에 크게 마음을 비우고 통합에 찬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네.

그러나 통합시가 성공한 이후 지역정치 상황이 혼잡해져서 평택시, 송탄시 지역 국회의원과 평택군당 위원장 간에 통합 평택시 시장 공천 후보를 무공천으로 결정함으로써 초대 민선 평택시장에 당선 될 수 있는 기회를 상실 하게 된 것은 친구와 나에게 있어서는 천추의 한이 되는 역사로 남겨질 것이네. 친구가 초대 민선 시장의 꿈을 이루었더라면 우리가 소년시절 꿈꾸어 왔던 평택시의 이상적인 발전에 더더욱 크게 이바지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일세. 

그러나 친구여! 그대는 경기도의원 2선을 하면서 부의장직까지 맡아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지역의 지도자, 그리고 나와 더불어 평택시발전협의회를 창립해 25년간 회원들과 함께 20여개 이상의 대규모 정책개발 사업을 성공시키는데 기여했으니 자부심을 갖고 이승을 떠났으면 하네. 특히 당진시와 아산시에 빼앗겼던 평택항 신생매립지 350만평을 나와 함께 공동대표직을 맡아 20여 년 간 시민운동을 해왔던 결과로 2021년 2월 4일 다시 평택시로 찾아오게 된 것은 평택시의 위대한 역사적 쾌거이니 친구는 부디 평택시에 태어나서 후회 없이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극락세계에 가서 편안히 쉬시길 바라네.

가장 사랑했던 나의 친구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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