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문예출판사

 

 
▲ 김미희 사서
평택시립 비전도서관

골치 아픈 사회문제를 다 해결한 멋진 신세계가 여기 있다. 인류가 오랜 세월 수많은 이념과 철학으로 꿈꾸던 유토피아를 과학기술의 무궁한 발전이 이뤄낸 곳.

“세계는 이제 안정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행복하고, 원하는 바를 얻으며, 얻지 못할 대상은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잘살고, 안전하고, 전혀 병을 앓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늙는다는 것과 욕정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때문에 시달리지도 않고,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 따위의 강한 감정을 느낄 대상도 없고, 마땅히 따르도록 길이 든 방법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행동은 하나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혹시 무엇이 잘못되는 경우에는 소마가 기다립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한 해를 기원으로 삼아 시작되는 이 소설은 놀랍게도 1932년 작품이다. 작가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가 왕성한 힘을 발휘할 때, 과학기술을 업고 무한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끝은 강력한 통제로 지배되는 전체주의 사회가 될 거라는 충격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미래사회에 성취된 안정, 행복, 평화, 공동체 등의 가치는 우리가 익히 알던 선한 개념이 아니다. 갈등과 분열의 싹을 아예 없애고자 인간은 공장에서 만들어낸다. 태아 때 산소 주입량에 따라 지능의 차이를 만들어 지식계급부터 노동자계급까지 필요한 일에 따라 다양한 계급으로 생산해 서로의 역할에 만족하며 산다. 

감정과 욕망 없이 쾌락만 있고, 문명은 곧 살균으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일부일처와 가족을 금지하니 성은 쾌락을 위한 공동의 것이 되었다. 고통이라도 느껴지면 눈물 없는 기독교라 칭하는 알약 ‘소마’를 먹는다. 철저한 통제로 만들어진 안정과 평화요 행복이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주인공 존은 인간의 본성인 희로애락을 원한다.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 드러나고, 눈물이 있어야 순정한 기쁨을 만끽할 수 있듯, 진정한 공동체라 일컫는 다면 개인의 자유와 존엄이 바탕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과 사랑, 욕망과 감정까지 통제해서 안정된 사회는 오직 3S 영화, 스포츠, 섹스에 중독된 쾌락만이 허용될 뿐. 인간다운 삶을 갈망했던 주인공은 결국생명을 놓아버린다.

우리는 ‘좋은 사회’를 제도화하기 위해 정치를 한다. 좋은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빅 브라더가 감시하고 억압하는 전체주의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면, <멋진 신세계>에서는 과학기술을 업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조정하고 안락과 쾌락으로 통제하는 섬뜩한 전체주의를 경고하는 셈이다.

지금까지 이 책이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는걸 보면 그의 불길한 예측이 유효한지도 모르겠다. 글로벌한 지금의 세계에서 세상을 통제하고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무슨 이유를 대고,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개인의 자유가 존중받고 인간다운 사회를 가꿔가려면 우리는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 질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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