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들판을 간척하고
수로에 보洑를 쌓아
농사를 지었던
민중의 삶을 담아내야

 

 
▲ 김해규 소장
평택인문연구소

2주 전 올해 2월 22일 개관한 경북 예천박물관을 다녀왔다. 예천군에서 건립한 공립 종합박물관이다. 예천醴泉이라는 지명은 ‘크고 넓은 땅’이라는 의미의 고대 한국어인 ‘단슬얼’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땅이 넓고 물이 풍부해서 농사가 잘되어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명문가문이 세거했으며, 1960년대에는 16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농촌인구 고령화와 이촌향도移村向都로 1990년대 후반쯤 인구가 4만 명대로 떨어졌고, 농업까지 쇠퇴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받았다. 다행히 근래 경북도청이 예천 경계인 안동시 풍천면으로 이전하면서 인구 5만 명대를 회복했다.

인구도 적고 재정도 열악한 자치단체에서 건립한 박물관의 모습이 궁금했다. 어떤 역사관을 갖고 예천의 역사를 바라봤는지, 철학과 비전이라는 생각의 그릇 속에 예천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수집하고 담아냈는지도 궁금했다. 우리를 안내한 이재완 관장은 ‘유물을 수집하고 관리·연구·전시’하는 일의 어려움, 박물관에 대한 이해 부족과 예산 확보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그만큼 보람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많은 사람이 보물 268점과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33점을 비롯한 2만여 점의 유물을 보유했다는 점에 주목하지만, 박물관 건립으로 인해 예천군의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지킬 수 있게 되었고, 군민들이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역사학습을 하여 지역적 정체성과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평택시의 ‘평택박물관’ 건립이 속도를 내고 있다. 담당 국장과 과장, 팀장, 학예사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평택박물관연구소를 비롯한 민간에서의 지원도 활발하다. 얼마 전에는 민간의 지원과 평택시의 노력으로 평택시청 회의실에서 ‘유물 소장가와의 만남’이 개최되었다. 박물관팀에서도 유물수집 광고를 내고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박물관 건립은 평택시의 ‘대역사’다. 많은 예산을 들여 멋진 건축물을 짓는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콘텐츠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보니 모든 일이 쉽지 않다. 박물관 안에 평택지역의 역사관歷史觀과 철학을 담아내는 일, 평택역사와 민중들의 삶을 오롯이 담아내는 일도 만만찮다. 평택역사의 정체성이 무엇이고 그것을 유물과 해설, 전시를 통해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한다. 전시기법에 대한 고민, 박물관 교육에 대한 고민, 연구·수장시설에 대한 고민, 어린이박물관과 체험시설, 휴게시설에 대한 고민도 함께 담겨야 한다. 

필자는 평택지역 역사는 ‘민중民衆의 역사歷史’라고 주장한다. 과거 평택지역은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매우 열악한 조건이었다. 산이 낮아 바람을 막아주거나 땔감과 열매를 제공하지도 못했으며, 들은 넓었지만 황무지거나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벌이 대부분이었다. 물이 풍부했지만, 대부분 식수로 사용하기 힘든 짠물이거나 바닷물이었다. 거기에 바다와 수로가 발달하고 도로가 발달해서 외침이 있을 때마다 전쟁터로 변했다. 이 같은 땅에 모여든 사람들은 빈농貧農이나 유민流民들처럼 ‘자기 땅에서 유배된 사람들’이었다. 오갈 데 없었던 그들이 낮은 구릉을 의지해 평택들판을 간척하고 수로에 보洑를 쌓아 농사를 지었다. 근·현대에는 철도역 앞과 미군기지 주변에 터를 잡고 살아내기도 했다. 그들이 평택역사의 주인공들이다. 양반의 고장 예천에 건립된 예천박물관이 수백 년 ‘양반의 문화’, ‘지배층의 문화’를 자랑한다면 평택박물관은 굽었지만, 굳건히 평택땅을 지켜온 ‘민중들의 삶과 꿈’을 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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