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은 어린 누이의 손톱에 들이던 봉숭아 꽃빛이다. 어린 누이가 웃을 때마다 드러나던 잇바디도 분홍이다. 옛날이나 그리움에 색깔이 있다면 틀림없이 분홍색일 것이다. 살구꽃과 복사꽃은 분홍색이다. 진달래 꽃잎, 어린 여자아이의 잇몸과 목젖, 비둘기의 가는 발목, 갓 태어나 몸통에 털이 없는 쥐, 강아지, 돼지 새끼들은 분홍이다. 눈도 못 뜬 채 꼼지락거리는 분홍들. 분홍의 유효기간은 짧다. 분홍은 이내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고 없는 것들이 분홍으로 남는다. 물고기를 잡는 무릉(武陵) 사람이 하루는 시내를 따라 걷다가 홀연 복숭아나무 숲을 만난다. 그는 복숭아 꽃잎이 펄펄 날리는 숲을 지나 비옥한 밭과 아름다운 못이 있는 마을로 들어선다. 노인이나 어린이 모두 기쁜 듯이 즐거워하는 마을, 곧 복숭아꽃들과 향기로운 풀들이 우거진 무릉도원이다. 무릉도원은 난세를 피해 숨은 사람들이 만든 평화로운 세상이다.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의 이야기다. 그곳을 물들인 것은 필경 분홍이었을 것이다. 분홍은 유유자적의 너그러움, 사랑의 공존,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누가 분홍 앞에서 그리움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가. 그리움에 앞서는 그리움, 사랑에 앞서는 사랑, 평화에 앞서는 평화, 그게 분홍의 말이다.

‘이모’는 분홍의 어휘사전에 등재된 단어 중의 하나다. ‘이모’는 어머니의 자매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이보다 더 다정하고 정겨운 호칭은 없다. 그것은 이모들과 함께 자란 어린 시절의 따뜻한 추억 때문이다. 우리가 겪은 이모들은 넓은 다정함과 비상한 포용력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모에 대한 이상한 신념 같은 걸 갖고 산다. 이모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신기한 나무와 같다. 이모들은 조카들에게 늘 그 과일을 따서 주곤 한다. ‘이모’, 라고 나지막하게 불러보라. 그 어휘에는 아득한 그리움과 “그냥 서로의 삶의 삶이 포개지듯, 힘을 뺀 평화”가 느껴지지 않는가! 세상의 이모들은 홍학 같고 모란꽃 같다. 생활이 아무리 가파르고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그 위엄과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생의 무게를 지탱하며 걸어가는 것은 이모나 조카나 마찬가지일 텐데, 어쩐 일인지 이모들에겐 삶의 넉넉함이 더 느껴진다. 우리는 이모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슬픔의 이랑들이 있는지를 모른다. 이모들은 슬픔은 모르고 꿈결 같은 세월을 산다. 이모들의 세계에는 역경과 세파라는 건 아예 없고 오로지 다정함과 사랑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다. 조카에게 이모는 늘 자신의 것을 덜어 조카를 돕는 사람, 언제 어느 때던지 다정함을 베푸는 사람이다. 조카들의 눈으로 보자면 이모들은 불가사의한 존재들이다. 필경 천사들이 땅으로 내려와 이모라는 사람으로 변신하여 조카들을 돌보는 게 분명하다.

나이가 들고 세파에 시달리면서 우리는 세상이 분홍의 선의와 다정함만으로 이루어진 게 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정 넘은 시각 술집 화장실의 변기를 부여잡고 토할 때, 물기어린 눈으로 울긋불긋한 자신의 토사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볼 때 우리는 세상의 악의와 매정함에 몸서리를 치며, 우리는, 문득, 이모를 떠올린다. 사는 것은 고단한 일이구나! 다시 ‘이모’하고 불러보라. 이모, 온통 선의와 다정함만으로 이루어진 불가사의한 세계가 와락 다가온다! 우리 모두는 이모들을 사랑한다. 살면서 이모를 미워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젊거나 늙었거나 간에 나이든 술집 주모를 향해 ‘이모!’라는 부르는 사내들에겐 잃어버린 다정함, 잃어버린 평화를 찾으려는 애틋함이 깃든다. 우리 모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이모 앞에서는 철부지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세계에나 분홍의 망설임과 다정함은 살아 있다. 분홍의 깊은 내면에서 분홍의 다정함, 분홍의 이타주의가 완성된다. 나는 세상 살면서 남과 다투기보다는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분홍의 다정함과 분홍의 이타주의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이 쓰는 분홍의 말들을 좋아한다. 마크 트웨인은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로 “무지와 신념”을 들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지가 그릇된 고집과 만나면 민폐를 낳고, 신념이 그릇된 고집과 만나면 전쟁과 대량학살을 낳는다. 무지와 신념은 분홍이 없는 세계의 일이다. 그렇다고 분홍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릇된 분홍, 타락한 분홍도 있다. 그럴 때 분홍은 허영과 오만을 만난다. 허영과 오만은 악 중에서 가장 강도가 낮은 악이다. 그것은 남을 해치기보다는 자신을 해친다. 분홍이 허영이나 오만으로 나가는 것은 분홍의 내면에는 결기가 부족할 때이다. 분홍은 부계(父系)의 색깔이 아니라 모계(母系), 특히 자매 사이에 잔존하는 우정의 색깔이다. 분홍은 대체로 잔잔한데, 그것이 격렬해지는 것은 흰색으로부터 제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찰나에만 그렇다. 분홍은 분홍의 일로써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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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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