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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상업계 진출로
평택 상권을 잠식하다

 

일본인 가게, ‘경부선 평택’ 또는 ‘경부선 평택역 앞’ 위치
사카이백화점, 서울 혼마치 대상점을 능가하는 내용 갖춰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개방된 사회였다. 조선후기 쇄국을 지향한 시기도 있었지만 1876년 문호를 개방하면서부터는 국제질서에 편입됐다. 한말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해 정착했으며,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 사회는 해체되었다. 근대 전환기에 평택으로 이주한 일본인 사회는 지역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를 ‘식민잔재’라고도 한다.
<평택시사신문>은 성주현 평택박물관연구소장과 함께 한말 일제강점기 평택지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활동과 식민 잔재를 밝혀내고, 그들의 삶과 지역과의 관계성 발굴, 평택사람들의 삶과 독립운동 연관성 조명 등을 통해 평택지역의 변화과정을 추적하여 총 7회에 걸쳐 지면에 보도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일제강점기 평택 원평동 시가지(1920년대)

 

■ 일본인 진출로 상권도 침탈
   미곡상·숙박업·요리업 일본인 진출

1876년 강화도조약은 한국이 세계사에 편입되었다는 의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화도조약에는 당시 한국 경제를 침탈하기 위한 내용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항구 개방과 일본인의 통상 허가, 항구에 일본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의 수시 설치, 양국의 자유로운 무관세 무역, 일본 화폐의 통용 등인데, 이는 일제가 한국 상권을 침탈하려고 목적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인 상인들은 값싸고 질 좋은 상품으로 상권을 장악해 나갔다. 일제 강점 이후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화되었고, 이른바 지방의 크고 작은 도회지까지 일본인 상인이 진출했으며, 목 좋은 곳을 차지했다. 

평택도 일본인 상인들이 진출함에 따라 일본인 회사와 상점, 단체들이 늘어났고 상권을 잠식해 나갔다. 일본어 <조선신문> 광고에 의하면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나 상점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표>와 같다.  

 

 

 

<표>에 의하면, 일본인이 진출한 상권은 잡곡을 포함한 미곡상, 숙박업, 요리업, 건축토목과 관련 재료업계, 차량과 기계 관련 업종, 병원 등 다양한 분야였다. 특히 숙박업은 다섯 곳이 있었는데, 모두 일본인이 운영했다. 이는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고객이 주로 관청이나 단체 직원이 사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평택역 중심으로 상권 형성
   일본인 가게가 상당수 차지

평택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인 사회는 상권에 있어서도 역세권을 나름 활용하고 있다. 우선 교통이 편리한 평택역 부근에 가게나 상점을 확보하였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카이백화점을 비롯하여 가나하시상점 등 대부분의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은 ‘경부선 평택’ 또는 ‘경부선 평택역 앞’이라고 하여 평택역 부근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부선 평택’은 현재의 통복시장 일대로 보이고, ‘평택역 앞’은 원평동 일대이다. 

평택역 아닌 곳으로는 서정리역과 안중리 등에 한두 개의 일본인 가게가 있었다. 서정리역 앞에 있는 카미타니 上谷 상점은 점주인 가미타니 가메타로 上谷龜太郞가 자신의 이름을 상호로 했는데, 주로 여러 가지 물건 즉 잡화상이었다. 가미야마는 송탄 서정리 유지로 1929년 10월 서정리에서 오성 양교리와 성북 신포를 잇는 자동차를 허가받기 위해 시민대회를 주도한 바 있다. 안중에는 나카와키겐소우 中脇源藏 상점이 있었는데, 역시 자신의 이름을 상호로 하고 있으며, 일본과 서양의 잡화류와 식료품을 판매하였다.

가키우치 垣內 상점을 운영하는 가키우치 쓰네타로 垣內恒太郞 는 1901년 부산항에 상륙하여 부산 고쿠라 小倉 상회에서 근무하다가 1909년 독립하여 평택에 정착한 후 미곡상을 개점했다가 1933년에는 쌀 독점권을 확보했는데, 생산액이 연 2백만에 달하였다. 

▲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합병인계서(현 우리은행)
▲ 한성공동창고 평택지점 개점이 기록된 제2기 영업보고서(1907년)

 

■ 평택에 첫 백화점 등장
   사카이백화점 坂井百貨店 

백화점의 어원은 ‘갖가지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는 집’이다. 청나라 시기에는 모든 물건이 있다는 의미로 ‘만화점’이라고 하였는데, 방문한 황제가 찾는 물건이 없다고 해서 ‘백화점’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아무튼 백화점은 근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백화점은 규모가 큰 도시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평택에도 백화점이 등장했다. 바로 사카이 坂井 백화점이었다.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일본인이 발행한 <조선신문> 1928년 11월 17일자 광고였다. 신문에 실린 광고 내용은 간단했다. 위치는 경부선 평택, 전화 19, 안성에 지점이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사카이백화점은 <조선신문>에 모두 10회 광고를 게재했다. 사카이백화점 주는 사카이 부헤이 坂井武平이며, 초기에 사카이상점으로 출발했다. 

초기 취급 상품은 농기구, 잡화, 식료품, 의류 등이었지만 점차 품목을 재목 材木, 금물 金物 , 매약 買藥 , 자전거, 비료, 지물 指物, 석탄, 건축물 등으로 늘어났다. 1928년부터 백화점이라고 광고를 하였는데, <조선신문>에 의하면 서울 혼마치 本町 대상점을 능가하는 내용이 충실한 상점이라고 했다. 

 

■ 상권이 형성되면서
   은행과 금융조합 등 설립

이처럼 일본인 상점뿐만 아니라 평택인 상점이 늘어나고 상권이 크게 형성되면서 은행지점, 금융조합 등이 설립됐다. 지점이나 금융조합은 평택인 외에 일본인도 참여했다. 상업은행 평택지점에는 니노미야 二宮久一, 시마다 島田昇, 야마자키 山崎健藏, 다나베 田邊實, 와구다 和久田政 등이, 평택곡물검사소는 세라 瀨良彦三郞, 이치카와 市川省, 니시시마 西島音平 등이, 평택금융조합에는 우에노 上野進一郞, 이케다 池田養治, 마에가와 前川金藏, 고지마 小島純雄, 아라마끼 荒券定己, 다카시마 高島隆助 등이, 안중금융조합에는 오노 小野雅文, 유 理鐸 등이 지점장 또는 이사장,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대부분 지역에서 유지로 활동했는데, 이케다는 1928년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농촌구제에 노력하는 등 농촌 생활 개선에 힘썼다. 그밖에 평택학교조합, 평택소방조, 평택재향군인회 등에도 참여하였다.
 

▲ <조선신문>에 보도된 평택 사카이백화점을 비롯한 평택지역 광고(1934년 12월 19일)
▲ <조선신문>에 보도된 평택지역 관련 광고(1931년 8월 20일)

 

■ 평택의 기간산업인
   
전기·교통 관련 회사 등 설립

예나 지금이나 평택의 중요한 상권은 전기, 교통 등 기간산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평택의 전기와 교통 등 기간산업과 관련된 사업체는 대부분 일본인이 장악했다. 이는 일본인의 자금력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평택전기주식회사는 1929년 4월 24만 원으로 창립됐으며, 사장 고세 小瀨守次郞), 전무 모리 겐키치 森賢吉, 이사 히구치 ?口虎三 쿠라시게 倉重理良, 감사 나까시바 中柴萬吉로 모두 일본인이었다. 

교통 관련 회사는 평택자동차운수주식회사 등이 있었다. 평택자동차운수는 1929년 5월 창립됐으며, 초대 사장으로 모리 겐끼치 森賢吉, 전무에는 다카자키 高崎利信가 취임했다. 1932년 임원진은 사장에 이치카와 市川直衛, 전무 송병황, 이사에 모리 겐끼치, 가야마 香山弘, 나까세 長瀨熊次郞, 감사에 메라 目良廣과 송륜헌 등이었는데, 일본인이 절대적이었다. 초대 사장 모리 겐끼치는 평택역 인근에서 농기구를 취급하는 가네모 カネモ상회을 경영하고 광산업에도 뛰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평택학교조합 평의원, 병남면협의원, 평택소방조두, 경기도의원 등으로 활동했는데 평택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 유지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서정리운수합자회사가 있었으며 대표는 일본인 카미타니 上谷龜太郞였으며, 평택합동운수주식회사는 사장이 이성열이었지만 오카다 岡田武吉와 후지모토 藤本新二 는 이사로, 모리 겐끼치는 감사로 참여했다. 국제통운주식회사 평택지점 점주는 평택합동운수 이사로 활동하던 오카다 岡田武吉가 맡았다. 오카다는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카다상점을 경영하였다.

 

   
▲ 글·성주현
평택박물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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