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가
선호의 죽음에 빚져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도록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 김벼리
고. 이선호 군 친구

선호의 빈소를 지킨 지 오늘로 54일 째다. 평택항에서 산재로 사망한 선호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5월, 올해 들어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 ‘노동건강연대’에 따르면 모두 77명의 노동자가 한 달 사이 산재로 사망했다고 한다.

내 친구가 겪은 일이어서일까, 이제야 그저 흘려보냈던 수많은 산재 사망 소식들이 하나하나 눈에 박힌다. 날짜와 장소, 고인의 이름만 달라졌을 뿐, 모든 죽음이 선호와 닮아있다. 적절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았고, 고유 업무가 아닌 다른 일을 맡아야 했고, 있어야 할 안전관리자와 수신호자가 없었다. 희생자는 대부분이 비정규직, 하청업체 노동자였다. 책임자는 어떻게든 책임을 비정규직 노동자나 하청업체에 떠넘겼다.

너무나 기본적인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았기에 친구가 죽었다. 같은 죽음들이 반복되고 있다. 사전 안전교육을 했다면, 컨테이너 불량을 점검했다면, 안전관리 책임자나 신호수만 있었다면, 이 중에 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지켜졌다면, 선호는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안전 단계 하나하나가 선호를 살릴 수 있는 순간들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고작 이걸 안 해 내 친구는 죽었다.

‘고작’ 안전 수칙 몇 단계가 왜 지켜지지 않는 걸까. 이 쉬운 변화가 왜 일어나지 않는 걸까. 참사는 사람을 가려서 오지 않는다. 나와 내 친구들은 종종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선호가 일한 평택항 부두에서 아르바이트한 친구도 있다. 아마 많은 청년이 이러한 현장에서 아르바이트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아무도 일하다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목숨 걸고 공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용돈벌이로, 대수롭지 않게 간다. 어떤 누구도 죽음을 각오하고 일하러 가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친구가 일하다 죽을 거라고, 내 가족이 일하다 죽을 거라고, 내가 일하다 죽을 거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니 너무 당연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아서 사람이 일하다 죽어 나가는 것을 더 많은 이가 억울해하고 슬퍼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청년이, 노동자가 죽어 나가는데도 애도만 표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분노해 줬으면 좋겠다.

그 당연함에 대한 분노가 모여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누군가의 죽음으로만 세상이 바뀔 수 있지 않도록. 슬픔을 반복하지 않게, 예상되는 죽음을 미리 방지할 수 있게 법과 제도를 사전에 마련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사람 목숨이 돈보다 소중하다 해도, 아무리 죽이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면, 바뀌지 않는다면, 사람 목숨이 비싸지도록, 죽이면 큰일 나도록 법을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번 정부가 남은 1년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을 거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오늘 또 내일, 죽어가는 누군가의 친구를 가족을 하나라도 살릴 수 있다. 더 이상 죽게 하면 안 된다. 이 사회가 선호의 죽음에 빚져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도록, 어떤 변화라도 좋으니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게 ‘중대재해처벌법’ 재개정이어도 좋고, 비정규직 철폐여도 좋다. 뭐라도 좋으니 나중에 말고, 지금 당장 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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