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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광복으로 일본인 사회 해체,
강점기 일본인 연구 필요하다

 

평택사람과 일본인의 보이지 않는 총성, 당시 상황 조명 필요
최근 들어 일제강점기 일본인 관련 지역 연구 상당히 진행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개방된 사회였다. 조선후기 쇄국을 지향한 시기도 있었지만 1876년 문호를 개방하면서부터는 국제질서에 편입됐다. 한말과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해 정착했으며,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 사회는 해체되었다. 근대 전환기에 평택으로 이주한 일본인 사회는 지역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를 ‘식민잔재’라고도 한다.
<평택시사신문>은 성주현 평택박물관연구소장과 함께 한말 일제강점기 평택지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활동과 식민 잔재를 밝혀내고, 그들의 삶과 지역과의 관계성 발굴, 평택사람들의 삶과 독립운동 연관성 조명 등을 통해 평택지역의 변화과정을 추적하여 총 7회에 걸쳐 지면에 보도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평택장터 풍경(1920년대)

 

■ 근대전환기 평택의 일본인 사회 변화
1905년 경부선 개통 후 평택 이주 시작

일반적으로 ‘근대전환기’라고 하면 1876년 일본과 체결된 ‘강화도조약’과 이에 따른 개항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의 시기를 이른다. 이 시기 한국은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한편 이에 대한 저항도 적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또는 민족운동 등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체제로부터 해방을 위해 투쟁했는가 하면, 일제에 협력하는 세력과 인물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는 일본인 사회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일본인 사회는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으로 이주한 일본인이 정착하면서 요소요소에 형성됐다. 평택지역은 부산, 서울, 인천 등 주요 도시나 개항장보다는 늦은 경부선 철도가 개통한 1905년을 전후해 일본인이 하나 둘씩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1910년대 평택역을 중심으로 일본인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평택역 일대는 기존 평택사람과 일본인 사이에 경제권을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시작됐다. 일본인들은 관변적 성격이 강한 조합 등의 단체를 조직해 경제권을 장악해나갔다. 물론 이들 단체에는 일부 평택사람도 참여했으며, 나름대로 지역의 경제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전시체제기 이후에는 대부분이 일제 지배에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평택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인 사회는 평택지역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그동안 평택지역은 진위군 중심지인 북면 봉남리가 행정과 경제 등 사회적으로 중심이었지만 경부선 부설과 평택역이 개설되면서 평택역 주변으로 이동하였다. 지금의 원평동, 통복동, 비전동 일대는 그야말로 일본인들이 잠식했으며, 근대 도시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점차 안중, 팽성, 서정리, 서탄면 일대까지 진출해 토지를 개간하거나 매입해 크고 작은 농장을 경영했다. 평택이 가마니와 배로 유명해진 것은 이 시기로 볼 수 있다.
 

▲ 평택세무서(1934년 12월 19일)

■ 일본인, 학교조합·소방조·재향군인회 등 조직
1945년 광복으로 일본인 사회 해체

평택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확립하기 위해 일본인 중심의 각종 단체를 조직했다. 이른바 학교조합, 소방조, 재향군인회, 애국부인회 등이다. 학교조합은 일본인 본위의 교육을 위한 조직이었다. 1906년 ‘거류민단법’ 공포로 당시 한국 내 일본인들은 자치조직인 거류민단을 설치하는 한편 일본인의 교육에 관한 ‘학교조합령’을 발포했다. 이를 계기로 평택에서도 학교조합이 조직됐다. ‘학교조합’은 거류민단이 해체된 이후 일본인 사회의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단체가 됐으며, 평택지역 일본인 유지들은 운영의 중심이 됐다. ‘소방조’는 화재를 예방하고 진화하기 위해 조직된 민간단체이면서도 지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다. 
소방조 조직은 조두과 부조두, 그 아래 부장과 소두, 소방수 등을 뒀다. 조두와 부조두는 대부분 일본인들이 맡았다. 1915년 ‘소방조 규칙’이 발포됨에 따라 경찰서의 지휘 감독을 받는 관변단체가 됐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소방서가 없었기 때문에 평택지역에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조의 역할이 컸다. 평택역 일대에 크고 작은 화재가 많이 발생했는데, 이들의 활동은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따라서 지역 주민의 인식도 호의적이었다. ‘재향군인회’와 ‘애국부인회’는 철저하게 일본인 중심 관변단체였다. 이 두 단체는 원래 단체명 앞에 ‘제국’이란 명칭이 붙어있듯 제국 일본을 위한 단체였다. 재향군인회는 해군기념일 또는 육군기념일에 총회를 개최해 제국 일본군의 정신을 기렸다. 1927년 3월에 개최한 정기총회에서는 ‘러일전쟁과 구주전쟁’이라는 강연을 통해 일본이 승리한 전쟁의 영광을 기억하고자 했다. 이는 침략전쟁을 미화하려는 일본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인 단체는 일본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식민지배 체제와 맞물려 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시체제기가 형성되는 1931년 이후에는 침략전쟁 동원에 앞장섰으며, 철저한 ‘내선일체’ 즉 ‘황국신민화’하는데 적극 참여했다.
1945년 광복으로 개항 이후 형성된 일본인 사회가 해체됐듯 평택지역에서 일본인 사회도 자연 해체됐다. 패전 이후 일본인은 여전히 한국에 머물려고 했지만, 미군정은 무조건 송환을 발표함에 따라 평택지역 일본인도 모국으로 돌아갔다. 광복 당시 평택지역 일본인에 관한 기록들이 남아있지 않아 그 동태를 확인할 수 없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빈털터리로 한반도를 떠나 일본 본토로 귀국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은 한국인에게 피해를 입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일본 우익들은 이들을 ‘피해자’라고 인식했다. 이는 ‘요코 이야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 평택사람과 일본인 갈등 발생
22세 일본 순사, 63세 노인 폭행 사망

일제강점기 평택에 살았던 일본인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은 어떠했을까가? 이와 관련된 기록은 사실상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호의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평택사람을 하대하거나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1932년 7월 평택경찰서 안중주재소에 근무하는 일본인 순사 가와하라 川原時三郞은 22세 불과했는데, 63세 노인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가와하라 川原는 새벽까지 술을 먹고 돌아가던 중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고 뒤쫓아 갔으나 찾을 수 없었다. 마침 63세 주민 황영천을 만나 수상한 사람의 행방을 물었으나 모른다고 대답하자 가지고 있던 목도 木刀로 난타해 사망했다. 이 사건에 대해 우에나이 上內 경기도 경찰부장이 해명을 했지만, 평택주민의 인식은 싸늘했다. 가와하라 川原는 이 살인사건으로 징역 5년을 구형받았다.
1933년 5월 일본인 평택가마니검사원 삿사 佐佐의 구타사건이 일어났다. 송탄 사는 청년 한원석은 가마니 검사에서 한국인 검사원에서는 상등급을 받았으나 삿사 佐佐에게서는 중등급을 받았다. 이에 대해 억울함을 불평했다가 삿사 佐佐에게 무수하게 구타당했다. 이 사건에 대해 평택사람들은 일본인의 폭행에 대해 비난했다. 이와 같은 비난은 그동안 일본인 검사원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일본인이 병남면 동삭리에서 평택사람 다섯 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살인사건으로 동삭리 주민 30여 명이 살인을 한 일본인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지역 주민들은 일본인을 잡으려 했는데, 들고 있던 절구공으로 반항해 결국 일본인을 죽이게 됐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지역 주민들의 행위는 정당방위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주동 인물 두 명에 살인죄를 적용해 경성감옥으로 송치했다. 이들은 결국 징역 4년을 구형받았다.

▲ 조선신문 평택 특집보도(1931년 2년 22일)
▲ 조선신문 평택 특집보도(1932년 1월 30일)
▲ 조선신문 평택 특집보도(1932년 1월 30일)

■ 일본인, 소방조 등 관변 활동 적극 참여
청일전쟁 승리 평택·성환전투 찬양 나서

평택에 이주한 일본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회고록이나 구술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인의 삶을 추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본인이 발행한 <조선신문>을 보면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 
소방조 조두와 부조두로 활동한 바 있는 모리 森賢吉, 오쿠무라 奧村政次郞, 나가세 長瀨熊次郞는 다년간 소방 활동에 진력했으며, 평택에 소방시설을 확충했다. 이로 인해 평택지역에 화재가 나면 진화 활동에 적극 나섰으며, 수해가 발생하면 구호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모리 森賢吉는 소방 활동과 소방시설 구비 등 공적으로 평택경찰서와 조선소방협회로부터 수상을 받는 등 명조두로 이름을 알렸다. 이외에도 그는 평택의 여러 분야에서 공직을 맡아 평택지역 개발에 공적이 있을 일본인뿐만 아니라 평택 지역주민으로부터 신뢰가 크다고 했다. 
서탄면 금암리에서 진위흥농을 설립한 야마다 山田顯義는 평택에 이주해 황구지천 일대를 개간해 농지를 확보했으며, 진위흥농을 해산할 때에는 소작인들에게 분급하기도 했다. 소작인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평택을 발전시키기 위해 ‘평택발전회’를 활용하였다. 평택발전회는 3.1운동 이후 평택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됐지만, 점차 일본인이 중심이 됐다. 1930년에 이르러 평택의 상징인 평택시가지 중심에 있는 연못을 메워 시장을 신설하기로 했는데, 이를 앞장서 추진한 것이 평택발전회 회장 모리 森賢吉였다. 모리 森賢吉는 평택 번영의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적극 추진했다. <조선신문>의 기사에 의하면 모리 森賢吉에 대해 “10년을 하루 같이 평택 발전에 힘을 다해 부지런히 노력하였다”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대부분 나름 치열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선전가’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선전가는 조선에서 쌀 생산지는 평택평야, 역에는 산과 같이 쌓여있는 가마니 등으로 평택의 평야와 쌀, 가마니 생산을 자랑하고 있으나, 청일전쟁의 승리한 평택·성환전투를 찬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 ‘침략과 식민지배’ ‘근대 이양’ 양면성
재평택 일본인 연구, 앞으로의 과제

최근 한 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2000년대 초 유기발광다이오드 OLED를 생산한다고 할 때 일본에서는 “차라리 후지산을 물구나무 걸음으로 오르겠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는 일본은 여전히 강점기 시기의 우월인식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현재는 일본의 코를 납작 눌렀다. 일본은 결국 OLED 생산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은 세계 OLED 시장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들어 일제강점기 일본인 또는 일본인 관련 연구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 지역에서도 이러한 일본인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연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인식은 그만큼 암울했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발로이기도 하다. 그 연장선에서 한말과 일제강점기 평택에 이주 정착한 일본인과 일본인 사회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일본인에 대한 시선은 늘 두 가지가 상존하고 있다. ‘침략과 식민지배’, ‘근대 이양’이라는 양면성이다. 그러면서도 일본과 마주할 때는 ‘늘 이겨야 한다’는 생각 즉 극일을 마주하게 된다. 
그동안 일곱 차례의 이번 <평택시사신문> 기획특집 기사 연재는 일제강점기 평택에서 살았던 일본인 사회를 조금이나마 밝혀내는 성과와 함께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를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 글·성주현
평택박물관연구소장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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