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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탈출해 중국 망명한 원심창,
상해 남화연맹을 재건해 의열투쟁에 나서다

 

1927년 2월 17일 일본 도쿄 긴자거리에서 연설 벌여 큰 호응
조선인단체협의회, 중앙집권적 정치조직화 되자 탈퇴 후 대립 
‘동경학우회사건’으로 원심창과 최복선, 한하연 등 7명 구속
원심창, 항일 선전활동과 ‘흑색공포단’ 활동에도 적극 참가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항일 독립투사이자 통일운동가 원심창(元心昌, 1906~1971) 의사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50년이 되는 해이다. 원심창 의사는 생전에 항일·반독재 통일운동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불꽃처럼 살다 떠났지만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만으로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지금까지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최근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와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사료발굴과 학술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선양사업도 체계화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평택시사신문>은 원심창 의사 50주기를 기념해 최근 역사학계에서 새롭게 밝혀내고 있는 원심창 의사의 독립투쟁과 건국활동, 평화통일운동 등 평생을 바쳐 이룩한 업적을 조명하기 위해 모두 6회에 걸쳐 기획특집 기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 원심창 등의 참여로 발행한 ‘조선동흥노동동맹’의 기관지 <동흥노동>(1928년)

 

 

 

■ “독립정신이 불타오르다”
일본 경찰·친일단체 ‘상애회’와
공산주의자들을 맨몸으로 맞서

1927년 2월 17일 아침부터 일본 도쿄 번화가인 긴자 銀座 거리에 젊은 청년 10여 명이 행인들에게 격문을 나눠주고 거리 연설을 벌여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포악한 일을 보라, 일본 민중에게 하소연하노라’는 호소문과 함께 유창한 일본말로 연설하는 청년은 일본대학 중퇴생인 원심창이었다. 일본 경찰은 서둘러 출동해 이들 한국 학생들을 연행해 나고야경찰서에 구금했다. 이날 거리시위 소식은 조선 본국 <동아일보>에 ‘동경 東京 조선인학생단 격문살포 가상연설’이라는 제목으로 실렸고, 나아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 단체 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에 실릴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태의 발단은 한인 학생들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 수십 명이 원심창 등이 거주하는 기숙사 ‘계림장’을 강제 수색한 후 태도가 불온하다는 이유로 구타하고, 경찰서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이에 원심창 등 학생들이 거리에 나가 구속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한인 학생들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와 검속, 민족차별 조치는 이뿐만 아니라 친일단체 ‘상애회’를 동원한 위협과 폭력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경찰은 취업 알선을 명분으로 노동력 갈취와 고리대금업을 일삼아 원성이 높은 매국단체 ‘상애회’를 이용해 재일한인 노동자들과 민족적 유학생들을 감시·통제했다. 급기야 ‘상애회’가 경찰의 비호 아래 권총과 일본도, 단도 등으로 무장한 채 공공연히 한인 학생 기숙사 ‘계림장’을 습격하기에 이르자, 원심창 등이 지역주민들과 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이를 반격해 퇴치시켰다. 경찰은 양측의 무력충돌로 인한 부상자 발생을 빌미로 모두 체포해 ‘상애회’를 비호하려 했지만, 오히려 ‘계림장’ 학생들의 정당방위가 입증됨에 따라 좌절되고 말았다. 
원심창의 ‘흑풍회’는 친일단체의 횡포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세력 확장에도 맞서 싸워야 했다. 당시 ‘일월회’ 등 공산주의 성향의 한인 단체가 1만여 명 규모의 회원을 가진 ‘재일노동총동맹’으로 성장해 대중운동과 계급투쟁을 주도했다. 1926년 말경 ‘재일노총’은 정치투쟁과 단일 정당 결성을 선언하면서 ‘조선인단체협의회’와 ‘신간회’를 결성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이 ‘조선인단체협의회’를 상시 의결기관으로 전환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조직으로 이끌어 가려 하자, 원심창 등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적 자유연합적 협의기관으로 운영하자고 맞섰다. ‘조선공산당’의 지도를 받고 있던 협의회가 중앙집권적 정치조직으로 바뀌자, 원심창 등은 이에 반발해 협의회를 탈퇴하면서 이들과 대립했다.

 

▲ 원심창의 중국 망명을 보고한 서울경시청 첩보 내용(1932년 10월)

 

▲ 1930년 4월 결성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강령과 규약

 

■ 흑풍회-흑우연맹 자유노동조합 지원
 동경학우회 사건으로 구속

원심창 일행은 일본 정부와 대기업의 수탈, ‘재일노총’의 횡포에 맞서 한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1927년 자치단체인 ‘조선자유노동자조합’을 결성한 데 이어 당시 최대 노동조합인 ‘조선동흥노동동맹’을 우의 협력 단체로 만들었다. 이들은 자체 선전대를 편성해 조선 노동자들의 합숙소를 순방하고, 기관지 <자유사회>를 배부하여 항일과 반공산주의 의식을 갖도록 설득했다. ‘흑풍회’는 보다 강력한 반일 반공산주의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28년 1월 15일 ‘흑우연맹’으로 확대 개편했다. 
‘흑우연맹’은 ‘신간회’를 이용해 유일 정당을 추진하려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1929년 2월 9일 원심창과 이혁 등은 ‘재일노총’ 도쿄노동조합을 습격해 수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발단은 회원 탈퇴와 이적문제로 빚어졌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유일당 결성에 대한 반대운동 때문이었다. 이러한 갈등의 와중에 원심창 일행은 그해 6월 7일 춘계운동회 준비를 위해 ‘신간회’ 동경지회 사무소에서 협의 중이던 ‘학우회’ 간부들을 습격했다. 일명 ‘동경학우회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국내에 발생한 가뭄 피해가 심각해 ‘흑우연맹’ 회원들이 여러 차례 낭비적 운동회를 중지할 것과 본국 구호 활동을 펼치자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우회 측이 운동회 개최준비에만 열중한 것에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항의 방문하면서 발생했다. 이날 ‘신간회’ 도쿄지부를 찾아간 ‘흑우연맹’의 원심창과 6명의 회원들은 ‘학우회’의 비민족적 행위와 공산주의자들과의 처사에 항의하다가 폭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자유노조’ 조합원 1명이 사망하고 ‘신간회’ 측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동경학우회사건’으로 인해 원심창과 최복선, 한하연 등 7명이 구속됐다. 이들에 대한 공판은 1929년 9월 8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개정되어 사실심리를 끝내고 판결은 1930년 1월에 열렸다. 형무소에 수감된 백병련은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원심창을 비롯해 정찬진과 한하연·최복선·정진모 등 5명은 후세 다츠지 布施辰治 변호사의 알선으로 1930년 4월 29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 이후 더 이상 일제 당국의 감시 아래에서 일본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창은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보석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원심창은 곧 귀국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더 큰 독립활동을 위해 중국으로 탈출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는 많은 준비 끝에 1931년 이른 봄 가족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평택역에서 기차를 탄 후 비밀리에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동태를 내밀히 감시하던 일본 경찰조차 ‘상해로 도주’로 보고할 정도로 은밀히 집을 빠져나온 원심창은 평택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나아가 국경수비대의 삼엄한 검문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심양~길림 거쳐 마침내 베이징에 도착했다.

 

▲ 중국 북경에서 원심창의 동지가 된 아나키스트 이용준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1938년)
▲ ‘동경학우회사건’ 신문보도(1929년)

 

■ 상해 남화한인청년연맹 재건
 서기부 총책임을 맡아
 본격적 의열투쟁 준비

베이징에 도착한 원심창은 민국대학 유학생인 유기석 柳基石과 정래동 丁來東, 그리고 이용준 千里芳 등과 교유하며 크로포트킨 저서를 읽고 ‘아나키즘 사상’을 공유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1년 5월 이용준과 함께 텐진 天津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 上海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총본부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다. 
‘의열단’ 참모로 활약한 류자명이 의장 겸 대외책임자를 맡고 있는 ‘남화연맹’은 산하단체로 ‘남화구락부’를 두어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했다. 또한 연맹의 강령과 규약, 선언문을 작성해 동지들을 규합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관동군 1만여 명이 만주를 침략함에 따라 항일전쟁이 본격화됐다. 이에 ‘남화연맹’은 곧 중국 국민당 원로이며 아나키스트 동지인 이석증 李石曾·오치휘 吳致煇 등과 연합해 국제적 의열단체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했다. 주로 일제의 군사기관 파괴, 요인 암살, 친일분자 숙청, 항일 선전 활동 등을 목적으로 한 이 행동대는 중국인 동지 왕아초 王亞樵와 화균실 華均實 등이 재정과 무기를 공급했고, ‘재북경동북의용군후원회’ 등 중국 항일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항일구국연맹’은 일제와 친일분자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흑색공포단(Black Terrorist Party, 일명 B.T.P)’이라는 직접행동대를 조직했다.
원심창은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한 후 1931년 10월부터 서기부의 총책임을 맡았다. 그는 서기부에서 청년동지들의 규합은 물론 각종 정세감찰과 보고, 항일사상 아나키즘 선전 등의 중책을 맡았다. 일본말이 유창할 뿐만 아니라 일본 동지들도 많이 알고 있어 그들로부터 귀중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연맹의 항일사상과 아나키즘을 선전하여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편제된 선전부에서 유자명과 유기석 등 이론가들과 함께 활동했다. 
선전부를 맡은 원심창은 1931년 8월 20일 국치일을 기념하며 ‘남화한인청년연맹’ 명의로 격문을 배포했다. ‘8월 29일은 조선민족이 이족의 노예가 된 날이다. 분발하여 적의 아성을 쳐부수자’라는 제목의 격문을 100여 매 등사한 그는 8월 27일과 28일 상해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배포했다. 원심창은 이듬해인 1932년 5월 1일 국제노동절을 맞아 선전문을 우송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노동절의 의의와 아나키즘 사상을 담은 선전문 100매를 제작해 상해와 북경, 천진 조선인을 비롯해 조선과 일본, 대만 등지에 발송했다. 또한 1933년 3월 1일에는 독립기념일을 맞아 선전문을 우송했다. 원심창은 자신의 주거지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저주하며 모든 사유재산제도와 권력을 파괴하고 무정부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려는 취지’로 쓴 선전문 70여 매를 등사해 프랑스 조계 한인들에게 우송했다. 원심창은 일본에서 같이 유학한 박기성 등과 함께 각종 기념일에 격문을 살포하고, 출판물을 발행해 선전했는데 활동 자금은 주로 상해에 거주하는 동포 실업자들로부터 갹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심창은 항일 선전활동 뿐만 아니라, ‘항일구국연맹’의 ‘흑색공포단’ 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그가 ‘흑색공포단’에 가입한 시기는 대략 1931년 11월경 무렵으로 보인다. ‘흑색공포단’ 행동대원으로 천진에 있는 일본영사관 폭탄 투척과 주중일본공사 아라요시 아키라 有吉明 암살을 추진했다. 천진 일본영사관 폭탄 투척은 1932년 12월 초순 추진됐다. 중국에서의 본격적인 의열투쟁이 그렇게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 글·사진/김명섭 
단국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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