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문화-조성진·김준경 선생

‘문화’ 보다 더디 자라는 생명은 없다.
인간이 먹고 사는 일과 하등 관계가 없는 문화는 돈을 먹고 자랍니다. 집안에 그림이 걸려있지 않다고 해서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클래식 음악을 들은 일이 없다고 장가를 못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림과 클래식음악을 ‘귀족문화’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문화는 우리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신발,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손끝에서 부터 발끝까지 아침 눈을 떠서부터 저녁잠을 잘 때까지 하루 24시간 우리가 먹고 입고 자는 일에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문화는 곧 실용이고  절약이며 효용성이고 속도를 높이는 절대적 가치입니다. 현대인의 생활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디자인 즉 문화의 역할은 더 넓어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1950년대 초기 컴퓨터 시스템은 항공기 조종사들의 비행훈련을 위한 ‘시뮬레이션’으로 부터 출발되어졌습니다. 당시 컴퓨터는 크기가 지금 학교 교실 3개만한 크기였고 진공관이 무려 20 만개가 들어있어서 기계를 작동시키면 얼마나 많은 전기가 소모되었는지 미국 ‘필라델피아’ 시내가 모두 정전停電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 컴퓨터는 책상위에 올라가는 ‘데스크 탑’이 되었고 1990년대에는 손에 들고 다니는 노트북으로 만들어졌다가 이제 우리는 컴퓨터를 호주머니에 넣는 ‘스마트폰’ 시대에 살게되었습니다. 이러한 진화와 발달은 모두 ‘디자인’ - 현대문화의 산물産物입니다.

평택은 본디 농노農奴의 고장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골기와로 된 전통 한옥기와집이 한 채도 없다는 것은 양반구경하기가 힘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내 땅 한 평 가져보지 못한 채 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이 살던 땅. 평택
그래서 그랬을까요? ‘평택은 우리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희박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점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어느 누구라도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열린 고장’이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내고 주인노릇을 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운 고장이었지요. 그래서 그런가요? 지금 이 시간 평택에는 보도 듣도 못하던 단체의 ‘장長’도 많고 ‘대표代表’도 많아졌습니다.
조성진 선생.
평택에서 GI로 군 생활을 마친 인연으로 평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조선시대 평양감사 부임길에 기생 황진이 무덤에 둘러 술 한 잔을 부은 풍류로 결국 평양감사도 못해보고 삭탈관직을 당한 백호 임제 선생의 환생이었을까요?
태생부터 광대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조성진 선생은 일정한 직업도 없이 남의 밥을 먹으면서 단 한 번도 웃음을 잃은 적이 없는 낙천가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 김준경 선생.
전공을 살려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지금은 남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되어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준경 선생도  한 때는 사회문화에 적극 참여하는 행동가였습니다. 비전동 차고에 임시 사무실을 만든 조 선생은 평택을 위한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평택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북카페를 통한 공동체 의식을 확산시켜나갔습니다.
그래서 문화운동의 실천방안으로 계간지 ‘평택문화’를 발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평택문화’의 표지인물로 지금은 작고하신 故 최은창 풍물놀이 명인을 선정했습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전통문화 계승자들은 새로운 사회 천민계급으로 전락해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고 관심도 갖지 않았을 때 ‘굴러온 돌’ 조성진 선생과 김준경 선생은 조용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로 시작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십시일반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면 가능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그래도 지역사회에서 이름께나 날리던 분들을 찾아 나섰지만 모두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분 서울의원 이계평 원장님이 후원금을 주셨습니다.
이후 평택에서 처음 열린 ‘시 낭송회’ 와 사진전. 미술전시회…
조성진과 김준경은 모두 적수공권이었지만 오로지 열정만으로 이룬 문화적 성과였습니다.
자신을 위한 생색내기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헌신적 기여를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문화라고 말합니다. 소비만이 미덕이었던 1980년대 문화 불모지 평택에 새롭게 길을 낸 사람 조성진, 김준경 선생.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을 우리는 개척자 혹은 선구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앞서가는 사람들’은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두 분이 있었기에 오늘의 평택이 있었다고 감히 말합니다.
평택읍이 시市가 되어 도시가 커지고 인구가 늘면서 함께 엄청나게 많아진 이런저런 자리에 앉아 ‘완장’를 차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딱한 생각만 듭니다.

대저 문화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일이고 돈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라 돈을 내고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조선시대에도 양반들에 의해 문화가 만들어지고 발전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전통문화가 되었습니다.
문화는 배워서 하는 일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타고나야 하는 일입니다. 문화란 남을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미쳐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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