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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삼정을 폭파하려던 흑색공포단
“우리는 아나키스트다 ”

 

원심창, 1933년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 ‘상해 육삼정의거’ 모색
도시락 폭탄 2개·권총 2정 준비, 밀정 밀고로 송강춘에서 붙잡혀
‘상해 육삼정의거’는 실패했지만 아리요시의 만주 공작 막아내
원심창·백정기 무기징역, 이강훈 징역 15년 구형, 1945년 출옥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항일 독립투사이자 통일운동가 원심창(元心昌, 1906~1971) 의사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50년이 되는 해이다. 원심창 의사는 생전에 항일·반독재 통일운동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불꽃처럼 살다 떠났지만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만으로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지금까지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최근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와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사료발굴과 학술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선양사업도 체계화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평택시사신문>은 원심창 의사 50주기를 기념해 최근 역사학계에서 새롭게 밝혀내고 있는 원심창 의사의 독립투쟁과 건국활동, 평화통일운동 등 평생을 바쳐 이룩한 업적을 조명하기 위해 모두 6회에 걸쳐 기획특집 기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 주중 일본공사 일행이 연회를 열려한 중국 상해 고급 요리점 육삼정의 현재 모습

 

▲ 육삼정의거의 주역 원심창 의사
▲ 육삼정의거의 주역 백정기 의사
▲ 육삼정의거의 주역 이강훈 의사

 

 

■ 만주를 일본에 넘기려는
 아리요시 주중일본공사 암살계획 세워

▲ 아리요시 아키라
주중일본공사

원심창은 이듬해 1933년 들어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다. 이른바 ‘상해 육삼정의거’인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有吉明 암살미수사건이다. 아리요시는 1932년 7월 23일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승인을 받아 특명전권대사인 주중국공사로 임명됐다. 사실 아리요시 공사에 대한 암살시도는 원심창에 앞서 한 차례, 이후 한 차례가 더 있었다. 첫 번째는 1932년 9월 26일 아나키스트 정화암이 이끄는 의열단체 ‘서간단’이 난징 南京으로 가는 기차에 폭탄을 설치했으나 발각돼 실패했다. 이후에는 평북 출생 22세 유형식이 1936년 2월 21일 상해에서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리요시 아키라가 한인 의열투사들에게 암살의 표적이 된 이유는 그가 일본 정부 밀명을 받아 중국 군사위원장 장개석을 4000만 엔에 매수해 그로 하여금 만주를 포기하도록 교섭하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다. 이미 열하 熱河에서 일본군에 저항하지 않도록 조치를 마친 그는 3월 14일 밤 중국국민당 요인들과 함께 상하이 무창로에 있는 일본 고급요리집 ‘육삼정’에서 송별식을 가진 후 3월 24일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러한 일정은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자세히 보도됐다. 
아리요시에 대한 정보는 ‘남화한인청년연맹(남화연맹)’ 서기부 책임을 맡고 있는 원심창이 처음 입수했다. 원심창은 상해 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연락처이며, 각국 동지들이 방문하는 상해 이매로 등몽선 鄧夢仙 화광의원 華光醫院에서 아리요시의 음모와 동선을 처음 접했다. 이 병원은 7개국 200여명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동방아나키스트연맹’을 결성한 바 있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주요 연락처이자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정보를 얻은 원심창은 실행 책임자인 정화암에게 알렸고, 이에 3월 5일 저녁 ‘흑색공포단’ 합숙소인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백정기 숙소에 동지들을 모아 대책을 협의했다. 단원들은 만일 아리요시의 계략대로 장개석과 중국 군부가 만주를 포기하게 된다면, 일본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더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조선과 중국의 해방이 어려워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아리요시 공사를 암살하고 이 사실을 선전문을 통해 폭로하여 계획을 무마시키기로 했다. 
이날 결의된 내용은 “아리요시 아키라 주중대사와 장개석 위원장의 밀약은 일본 민중의 고혈을 착취한 4000만엔을 제공한 사실과 4억 중국 민중을 무시하고 사리사욕에 빠져 일본과 타협한 것뿐이다. 따라서 이 의거는 양국이 더욱 반동화 되는 일을 저지시키고 민중의 정의를 격려하여 혁명의 단축을 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의에 따라 3월 5일 ‘남화연맹’ 단원들이 긴급회의를 가졌다. 이날 참석한 단원은 책임자 정화암과 원심창·백정기를 비롯해 ‘만주 독립군’ 출신 이강훈과 엄순봉(일명 엄형순, 영양), ‘의열단원’ 이용준(일명 천리방, 제천)과 김지강(일명 김성수, 밀양), 중국군 무관 박기성(제천)과 오면직(일명 양여주, 안악) 등 모두 사격과 무술에 능한 경험 많은 항일투사들이다. 여덟 명의 단원들은 제비뽑기로 실행자를 뽑기로 했는데, 단원 모두 이 ‘죽음의 의거’에 자원하는 바람에 선발하지 못했다. 
다음날인 3월 6일 아침 제비뽑기에도 실행자를 가릴 수 없게 되자, 정화암이 백정기와 이강훈을 선정한 후 현장 안내는 원심창이 맡기로 정했다. 백정기와 이강훈은 정화암과 이용준이 준비한 폭탄과 권총으로 암살계획을 준비했고, 원심창은 일본 아나키스트 야타베 무지 谷田部勇司와 협의해 아리요시 사진과 자동차 번호를 알아냈다. 제철공으로서 에스페란토를 배우다가 아나키스트가 된 야타베는 1928년 ‘동방아나키스트연맹’에 가입해 ‘흑색공포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 중국 상해 육삼정의거 보도(동아일보, 1933년 3월 21일자)
▲ 일본 경찰이 작성한 육삼정 검거계획도(1933년 3월)

 

■ 육삼정의거 거사 당일 송강춘에서
 밀정 오키의 함정에 빠져 일경에 붙잡혀

실행단원들은 3월 14일 밤 연회 장소인 ‘육삼정’을 답사한 후 거사를 위한 잠복 장소로 중국요리점 송강춘 松江春을 선정했다. 류자명은 거사 이후 보도용으로 사용될 선언문을 베이징, 텐진, 난징 등 각 신문사에 제공하기로 하고 ‘흑색공포단’이란 이름을 사용하자고 해 그대로 결정됐다. 거사에 사용할 암살용 도시락 폭탄 1개와 수류탄 1개, 권총 2정도 원심창 집으로 옮겼다.
최종 결정된 거사계획은 먼저 아리요시 공사가 육삼정을 나와 자동차에 타려고 할 때 백정기가 홍구공원에서 사용한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고, 터지지 않을 경우 이강훈이 수류탄을 던져 혼란을 틈타 도주한다는 작전이었다. 만일 체포될 경우 각자 소지한 권총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가능한 저항하면서 도주한다는 것이다. 도주 후 다시 만나는 장소는 결행 당일 결정해 두 사람에게 알려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러한 거사계획은 원심창에게 아리요시 일행의 회식장소가 ‘육삼정’이라는 정보를 알려준 밀정 오키(다마사키)에 의해 일본 경찰에 속속 새어나갔다. 상해 일본 영사관에 의해 고용된 밀정 오키는 원심창은 물론 ‘남화연맹’ 지도부 모두를 속이며 거사 세부계획과 참여자, 도피계획 등을 상세히 고해 바쳤다. 이를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원심창 일행은 사전 계획에 따라 3월 17일 오후 8시경 ‘육삼정’으로 향했다. 아리요시 공사가 9시 20분경 ‘육삼정’을 떠날 것이라는 통보를 받은 원심창 등 네 사람은 류자명으로부터 무기를 받아 몸에 숨긴 채 ‘육삼정’ 건너편의 중국요리점 ‘송강춘’에 들어가 요리를 주문했다. 
야타베 무우지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원심창 등 세 사람이 송강춘에 들어섰는데, 이미 손님으로 변장한 일본 경찰들이 배치돼 있었다. 낌새를 알아차린 세 사람이 자리를 뜨려 했으나, 방탄복을 입은 10여 명의 경찰이 들어와 총을 겨누며 일행을 체포했다. 이 장면을 직접 목격한 ‘송강춘’ 식당 주인이 중국 현지 신문에 인터뷰한 기사가 최근 알려졌는데, 다음과 같다. “제가 정말 놀란 건 세 명의 손님이 너무나 조용히 있었다는 거예요. 사실 그들은 모두 웃고 있었어요. 한명은 너무 웃어 얼굴을 얻어맞기도 했답니다” 거사를 실행하지 못하고 잡히는 허무한 상황에서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당당히 체포되는 강인한 인물들이었다. 1933년 3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일본 특고과 무장경관 십 수 명이 집을 포위해 元勳(경기, 원심창의 오기) 등 세 명을 체포하고 암살용 폭탄 2개와 권총 3정을 압수했다”고 대서특필했다. 
비록 거사는 불발에 그치고 말았지만, 애초 ‘흑색공포단’의 계획은 실패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상해와 북경, 남경 등 각 신문에 일제히 이 암살계획이 대서특필됐고, 그 이유가 상세히 보도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제가 꾸민 장개석과의 밀약은 세상에 폭로됐고, 중국 국민당 내의 반대세력과 민중들의 시위가 격화돼 아리요시의 공작이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체포된 원심창와 백정기, 이강훈 세 사람은 1933년 4월 14일 ‘치안유지법’ 및 ‘폭발물취체법칙’ 위반, 살인예비, 기물훼기피해 등으로 상해 일본 총영사관 관할 검사에게 송치됐다. 이어 4월 17일 기소 예심에 회부돼 7월 5일 종결됐다. 그러나 항일 동지들의 보복전을 두려워한 일제가 최남단인 나가사키 長崎 지방재판소로 재판을 회부시킴에 따라 원심창 등 세 명은 7월 10일 일본으로 압송되고 말았다.

 

▲ 1933년 3월 17일 체포 직후 일본영사관에서 작성한 원심창 보고서
▲ 원심창 의사 판결문

 

 

■ “정당한 행동을 하다가 죽음은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로
 일제의 죄악상과 야만적 행패 꾸짖어

1933년 11월 15일 나가사키에서 열린 공판에서 일본 검찰은 주모자급인 원심창과 백정기에게 무기징역을, 이강훈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이들은 검사의 논고에 대해 “우리가 너의 손에 잡힌 이상, 총살을 하든지 교살하든지 너희의 자유이다. 우리가 정당한 행동을 하다가 죽음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우리는 아나키스트임을 인식하라”고 일갈했다. 11월 24일 열린 판결에서도 법원은 검사와 동일하게 언도했다. 원심창은 최후진술에서도 유창한 일본말로 일제의 죄악상과 야만적 행패를 일일이 실례를 들어가면서 재판장을 꾸짖었다. 세 사람은 변호사의 항소권고도 일체 거절했다.

한편 원심창 등이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도쿄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은 이들에 대한 구원운동을 전개했다. 원심창 등이 일본으로 압송되자 ‘조선동흥노동동맹’ 동지 양일동과 최학주, ‘흑기노동자연맹’ 정찬진, ‘극동노동조합’ 진철, ‘흑우연맹’ 홍성환 등이 모여 구체적인 구원방안을 논의했다. 이들은 재일 한인 노동자들로부터 구원자금을 마련한 후, 홍성환을 대표로 삼아 나가사키로 파견했다. 홍성환은 헌 책상을 가장해 11월 13일 나가사키로 잠입해 각 신문사와 조선인 노동자합숙소에 사건의 전말을 적극 선전했다. 또한 공판심리가 열린 11월 15일에는 수백 명의 방청인을 이끌고 들어가 항의시위를 벌이다가 강제추방 당하기도 했다. 이후 원심창은 1945년 10월 10일 출옥할 때까지 일제에 의해 영어의 몸이 됐다.
옥중에 갇혀있는 12년 6개월 동안 원심창 가계에는 불행한 사태가 겹쳐 일어났다. 원심창을 가장 믿어주고 후원해준 맏형 원유학이 1937년 5월 어느 날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으러 간 후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백부님(1898~1937)은 강원도에서 교원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37년 어느 날 학교로 출근했다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일본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일로 돌아가셨는데, 지금까지도 사인이 무엇인지 왜 끌려갔는지 영문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후손인 방효탁·원영재는 원유학의 의문사도 일제의 고문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이어 원심창의 어머니 청해 이 씨 淸海 李 氏도 1941년 세상을 떠났다. 형님에 이어 어머니를 잃었음에도 무기수로서 곁을 지키지 못한 한이 얼마나 깊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 글·사진/김명섭 
단국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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