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남북통일촉진협의회 통일운동, 원심창의
통일이론과 방법을 그대로 적용하다

 

재일한인사회에서 원심창의 활동 가운데 핵심은 ‘통일운동’
원심창 등 민단 일부 인사, 북한이 제안한 남북 평화통일 찬성
남북통일촉진협의회, 통일정부는 자유총선거에 위해 구성 제안 
<통일조선신문> 창간, 조국의 평화적 자주통일운동을 추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항일 독립투사이자 통일운동가 원심창(元心昌, 1906~1971) 의사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50년이 되는 해이다. 원심창 의사는 생전에 항일·반독재 통일운동가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불꽃처럼 살다 떠났지만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만으로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지금까지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최근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와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사료발굴과 학술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선양사업도 체계화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평택시사신문>은 원심창 의사 50주기를 기념해 최근 역사학계에서 새롭게 밝혀내고 있는 원심창 의사의 독립투쟁과 건국활동, 평화통일운동 등 평생을 바쳐 이룩한 업적을 조명하기 위해 모두 6회에 걸쳐 기획특집 기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 원심창 의사 제49주기 추모식(국립대전현충원)

■ 분단의 아픔과 통일운동 전개
    원심창, 1951년 4월 거류민단 단장 취임

재일한인사회에서 원심창의 활동 중 핵심은 ‘통일운동’이라 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은 3년의 참화를 치르고 1953년 7월 휴전으로 중단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1년 후인 1951년 4월 거류민단 단장에 선임된 원심창은 거류민단 산하에 ‘전쟁원호사업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어 좌우 합작으로 ‘동화신용조합’을 창설했다. 
한국전쟁의 참화와 휴전으로 인한 조국 분단은 원심창으로 하여금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케 하였다. 일제강점기 아나키스트로 민족운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원심창은 조국의 분단이 무엇보다도 안타까웠다. 그는 “남북으로 국토와 민족이 분열된 후에는 무엇이나 비참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분단의 아픔을 토로했다. 그렇다면 원심창은 이러한 분단의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보았을까?
원심창은 미소 강대국 이익 때문에 조국이 분단됐다고 인식했다. 그렇지만 이들 강대국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분단 현실에서 원심창은 분단 원인과 책임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에 알리고 우리 형제들을 일깨워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원심창은 ‘남북통일촉진협의회’을 조직해 재일한인사회의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다. 
 

▲ 의사 원심창 선생 재일본한국인사회장
▲ 원심창 의사 건국훈장국민장 훈장증(1977년 12월 13일)

 

 

■ 남북통일촉진협의회 조직
    원심창 등, 조국의 평화적 통일 논의 지지

그렇다면 ‘남북통일촉진협의회’가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외적 요인으로는 1954년 4월 한국전쟁 종결을 위한 제네바회의, 6월 네루와 주은래의 ‘평화 5원칙’ 성명, 7월 인도네시아 휴전협정 성립 등 국제적인 평화공존 분위기였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수만 명이 희생을 당한 참상을 본 재일한인들은 무력통일을 배제하고 남북의 평화통일을 실질적인 문제로 인식했다. 내적 요인으로는 이해 10월 북한이 제안한 ‘남조선 전체 인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이었다. 북한은 10월 30일 ‘제8차 최고인민회의’에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남북 각 정당, 사회단체와 각계 대표들이 모여 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이 호소문은 한국 내 뿐만 아니라 재일한인에게도 전달됐다. 즉 ‘조련’과 ‘민단’ 간부, 중립계 인사, 상공계, 문화계 등 다양한 인사들에게 전달됐다. 여기에는 원심창, 권일, 박춘금, 백무 등 거류민단계 인사들도 포함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련은 호소문을 지지하는 한편 재일조선민족회의 소집, 남북조선대표자회의에 재일대표 파견, 재일조선인 권리획득 등을 결의했다. 뿐만 아니라 거류민단과 중립계 인사를 만나 평화통일촉진운동을 전개코자 했다. 이에 비해 거류민단에서는 북한의 제안을 북한의 정치적 모략으로 인식해 반대 성명을 냈다. 하지만 거류민단의 일부 인물들은 남북의 평화통일에 찬성했다. 이들은 원심창을 비롯해 권일, 배정, 정인훈 등이었다. 이들은 그동안 배척했던 조련 인물과 교류하면서 민족통일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여기에 중립계 인사들도 동참했다. ‘민단계’는 원심창, 권일, 배정, 정인훈 등이며, ‘조련계’는 남호영, 이북만, 이희원, 서종실 등이었다. ‘중립계’ 인사로는 김삼규, 박춘금 등이 참여했다. 

▲ 원심창 의사 관련 유물(일본 통일일보 소장)

 

 

 

■ 최초의 좌우합작 통일운동 추진
    1955년 1월 30일, 남북통일촉진협의회 결성

원심창 등은 11월 30일 ‘남북통일촉진준비회’를 결성했으며, 이후 수십 차례의 회의를 갖고 좌우합작 방법으로 ‘민단’과 ‘조련’의 조정적 역할을 하는 새로운 단체 조직을 목표로 12월 5일 ‘남북통일운동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어 12월 16일 도쿄 히비야공원日比谷公園에서 선언문과 강령,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이들은 1954년 12월 23일 ‘남북통일간담회’를 갖고 이듬해 1955년 1월 10일 ‘조국통일전국유지간담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가운데 원심창이 소속돼 있는 거류민단은 ‘남북통일운동준비위원회’ 활동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거류민단은 “통일은 좋으나 본국인 대한민국이 거부했으니 우리도 거부한다”고 하여, ‘남북통일운동준비위원회’와 교류를 반대했다. 이어 거류민단은 12월 30일 3개 조항의 경고를 발표하는 한편 1955년 1월 10일 도쿄도 거류민단 본부 단장인 원심창과 권일을 제명 처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창은 권일과 함께 통일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끌어갔다.
‘남북통일운동준비위원회’는 1월 30일 도쿄 시타야下谷공회당에서 ‘남북통일촉진협의회 전국발기인대회’를 갖고 ‘남북통일촉진협의회’를 결성했다. 남북통일촉진협의회 선언문과 강령에 의하면, 조국 통일을 위해 대동단결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통일정부는 자유총선거에 위해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남북통일촉진협의회의 주장은 유엔 방안과 유사했다. 이는 남북통일촉진협의회가 북한의 호소문을 적극 지지했던 조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다음날 1월 31일 ‘중앙협의위원회’를 열고 중앙대표위원 12명을 선출하고 사무국 임원진을 구성했다. 원심창은 중앙대표위원과 동시에 사무국장으로 선임돼 사실상 남북통일촉진협의회를 이끌어갔다. 뿐만 아니라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전문위원회를 두었는데, 원심창은 섭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 국가보훈처 2013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원심창 의사 업적 만화

■ 평화적 통일독립 촉진대회 추진
    남북통일촉진협의회, 민족주의 지향

한편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이날 당면운동방침을 결정했다. 당면운동방침 주요 내용은 좌우합작, 협의기관 결성, 통일운동촉진 서명운동, 거족적 3·1운동 기념식 거행, 전체협의회 개최 등이었다. 이에 따라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3·1절 기념식을 해방 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좌우 이념을 초월해 2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했다. 이 과정에서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3·1절 기념식 명칭을 ‘조국의 평화적 통일독립촉진 제36회 3·1절 기념중앙대회’으로 정했고, 슬로건과 결의문을 결정했다.
이외에도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평화적 남북통일 및 원자전쟁반대서명운동, 아시아제국회의 및 반둥회의에 통일문제에 관한 요청문을 보내는 등 대내외적으로 활동했다. 이로써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재일한인사회에서 새로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이념과 사상을 떠나 통일전선체로 교포사회를 지도했다.
재일한인사회에서 통일운동을 이끌어 가던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한국 정부와 거류민단의 견제, 그리고 조련의 방해로 불과 1년 만에 사실상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1955년 6월 25일에 ‘6·25기념평화제’를 3·1절 행사처럼 전국적인 행사와 평화시위를 기획했으나 거류민단과 조련의 저조한 참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북한은 해방 10주년을 맞는 8월 15일에 대규모의 경축 행사를 갖기로 하고 남북통일촉진협의회 대표를 초대했다.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사무국장 원심창을 비롯해 권일, 박춘금, 정인훈, 남호영, 이희원 등 여섯 명을 파견하고자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일본에서 3일간 ‘8·15해방 10주년 기념행사’를 좌우를 포함해 거족적으로 치르고자 했으나 조련의 방해로 끝내 제대로 기념행사를 갖지 못했다. 조련이 남북통일촉진협의회 행사를 방해한 것은 남북통일촉진협의회 활동이 좌우를 아우르고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재일한인으로부터 점차 호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련은 남북통일촉진협의회를 무력화시키고자했고,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 <통일조선신문> 창간, 대표상임고문 취임
    원심창, 통일운동 ‘민족주체성 확립’ 강조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방안을 모색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초기의 의욕적인 출발에 비해 그 활동이 흐지부지했다. 따라서 남북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민주사회동맹’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해 남북통일촉진협의회를 떠났다. 이후 남북통일촉진협의회는 원심창만이 계속 남아 명맥을 이어갔고, 1959년 이승만 정권에 반대해 일본으로 건너온 이영근과 조국의 평화적 자주통일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통일조선신문>을 창간하고 대표상임고문에 취임했다. 그리고 1965년에는 ‘한국민족자주통일동맹 일본본부’를 결성하고, 대표위원으로 선출돼 통일운동을 계속했다.
원심창이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 배경은 한국전쟁의 참화와 휴전으로 인한 분단, 그리고 한국통일에 유리한 국내외 정세였다. 원심창은 통일운동을 전개하면서 가장 강조한 것은 ‘민족주체성 확립’이었다. 그는 민족주체성 확립이 없는 통일은 ‘비참한 것’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원심창의 통일운동 핵심이론은 ‘주체성’이었다. 즉 원심창은 통일운동 주체성을 ‘우리의 손으로 성취한다는 자각과 이를 스스로 추진한다는 각오’라고 했다. 그리고 통일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연장선으로 인식했다. 나아가 ‘민족해방운동 혁명적 전통의 계승과 자신의 희생’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가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방략으로 선택한 아나키즘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원심창은 통일운동 주체성을 갖추기 위한 사상적 원칙으로 민족자결의 원칙, 평화의 원칙, 민주주의의 원칙, 국가동원의 정신에 입각한 국제협조의 원칙을 제시했다. 원심창의 통일운동 사상적 원칙은 민족자결, 평화, 민주주의, 국제협조였다. 이를 구체적인 실천운동으로 “우리들이 조국의 국토로부터 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것이나 남북협상을 요구하는 것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그 기초를 둔 것이고, 남북을 통한 총선거에 의해 통일정부 수립을 부르짖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관련 국제회의에서 합의를 바라는 것은 국제협조의 원칙이다”라고 설명했다.

■ 민족자결·평화·민주·국제협조 제시
    재일한인사회부터 통일 이뤄보자 제안

즉 외군 철수와 남북협상은 민족자결의 원칙, 남북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중앙정부 수립은 민주주의의 원칙, 그리고 국제회의를 통한 합의 도출은 국제협조의 원칙으로 인식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원심창의 통일운동 기본정신은 주체성 확립, 사상적 원칙은 민족자결, 평화, 민주주의, 국제협조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원심창의 통일운동 방법은 한 마디로 “각자의 정치, 사상은 그대로 고수하고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협의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즉 협의운동을 전개하되 조국의 어느 한 국가를 지지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양 정부가 동시에 협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다. 남북의 대화, 남북협상까지 이를 수 있게끔 우선 재일한인사회부터 통일을 이뤄보자는 취지에서 협의운동을 제안했고, 이를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남북통일촉진협의회의 통일운동은 원심창의 통일이론과 방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글·사진/성주현
평택박물관연구소장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