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심창 의사, 항일건국운동과
평화통일운동 업적 남겨

 

원심창, 흑우회 재건활동에 적극 참여해 다양한 활동 펼쳐
항일구국연맹 결성, 행동기구인 흑색공포단에서 직접 투쟁
 통협의 통일운동은 원심창의 통일이론과 방법 그대로 적용


 

 

국가보훈처 경기남부지청이 주최하고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원심창 의사 서거 제50주기 학술세미나’가 10월 8일 비전동 평택문화원 대동관에서 개최됐다. 
‘원심창 의사의 항일건국운동과 평화통일 사상’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학술세미나는 김해규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 이사의 1부 개회식 사회에 이어 박성복 운영위원장이 좌장을 맡아 학술세미나를 진행해 각계 전문가들의 기조발제와 토론이 이어졌다.  
김기성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장은 개회사에서 “원심창 의사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신 진정한 독립투사이셨고 내 한 몸 돌보지 않는 희생정신으로 모든 실천을 솔선수범하셨다”며 “이번 학술세미나를 계기로 원심창 의사의 살신과 희생정신 우리 사회에 더욱 확산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평택시사신문>은 이날 토론회를 지상 중계해 평택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원심창 의사가 갖는 국제적인 위상과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 지역사회와 기념사업회의 역할에 대해 모색해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박성복 운영위원장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

■ 토론 좌장
박성복 운영위원장/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

오늘 학술세미나는 원심창 의사의 출생과 소년기 평택역 독립만세운동 참여, 일본에서의 활동, 중국 톈진 폭탄의거와 무기징역 선고, 해방 후 민단 설립과 평화통일운동 등 생애사 전반에 걸친 업적을 조명하는 중요한 자리다. 특히 원심창 의사 선양에 있어 디지털 환경에서의 선양사업 방향 등을 심도 있게 다뤄 향후 원심창 의사의 항일독립운동과 평화통일운동 조명, 선양사업 체계화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 김명섭 연구교수
단국대학교

■ 기조발제
김명섭 연구교수/단국대학교 

일본에서의 아나키스트 활동 활발
중국 망명 후 적극적인 항일투쟁

원심창은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출신으로 평택공립보통학교를 다녔으며, 평택에서 3.1운동을 체험한 것은 민족의식에 눈뜨게 한 사건이었다. 원심창은 배움에 대한 꿈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품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으며, 신사상에 관심을 갖고 아나키즘 사상의 대표자인 러시아 사상가 크로포트킨과 일본의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의 저서를 탐독했다. 원심창이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걷게 한 계기는 1923년 9월 1일 도쿄대지진 와중에 벌어진 오스기 사카에 살해사건과 ‘박열 사건’이었다. 원심창은 일본 조선인학생 숙소인 계림장에서 흑우회 정찬진, 후일 중국 상하이 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같이 활동한 박기성 등과 같이 기숙하며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을 펼쳤다. 계림장에서 ‘무산학우회’에 가입해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오타루 고등상업학교의 군사교육 반대운동에도 참여하는 한편 흑우회 재건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원심창이 활동했던 흑우연맹은 1928년 창립부터 1936년 해체시기까지 항일투쟁은 물론 반공산주의 활동과 선전활동, 노동운동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원심창은 25세에 중국으로 망명해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꾀하고자 했으며 1931년 5월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총본부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서기부 책임을 맡았고, 선전부에서 활동했다. 원심창은 항일 선전활동뿐 아니라 항일구국연맹의 흑색공포단 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 양지선 연구위원
독립기념관

■ 기조발제
양지선 연구위원/독립기념관

원심창, 남화연맹 재건 주도와 활약
항일구국연맹 행동기구 흑색공포단 조직

원심창은 1931년 5월 남화연맹에 가입했지만 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상태에 빠졌고 원심창은 재건을 주도했다. 북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동지들이 상하이로 집결하며 남화연맹 조직은 크게 확대됐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의 항일세력은 한국독립운동세력과 연대해 만주의 무장단체, 관내 임시정부, 아나키즘 세력 등 지역과 계열을 초월한 광범위한 연대가 이뤄졌다. 1931년 10월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했고, 행동기구로 흑색공포단을 조직해 중국 톈진, 상하이, 난징 등에서 직접투쟁을 전개했다. 유기석이 주도한 톈진투탄의거는 원심창, 이용준이 함께 했으며, 톈진일본총영사관저 등에 폭탄을 던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차 투탄의거를 계획하고 정금은행, 일본군 주둔지 등에 연이어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목적을 이루진 못했지만 이들이 톈진 내 일본 시설과 인물 등을 대상으로 실행한 투탄의거는 일본이 추진하던 화베이 분리에 따른 중국 침략야욕을 저지하는데 일조했으며, 윤봉길 의거 이후 한국독립운동세력의 독립에 대한 열의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 성주현 연구교수
전 숭실대학교

■ 기조발제
성주현 연구교수/전 숭실대학교

건동·민단 결성, 아나키스트로 활약
통협 결성으로 평화통일운동 주력

해방 후 원심창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민족주의 세력을 집결해 건동과 민단 결성 주도, 다른 하나는 좌우합작을 통한 평화통일운동이다. 원심창은 해방직후 가고시마형무소에서 석방됐으며, 고국으로 귀환해 국내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1946년 일본으로 건너가 박열, 이강훈과 함께 건동 결성을 주도했고, 재일한인의 생활안정과 권익옹호를 위해 민단 창설에도 적극 참여했다. 초대 사무총장, 민단 부단장 및 단장,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원심창이 건동과 민단에서 활동한 것은 아나키스트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과 민족주의 세력 집결이라는 당위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원심창은 통일운동 기관으로 통협을 결성했으며, 중앙대표위원과 사무국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통협을 이끌었다. 통협은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지만 원심창은 끝까지 통협을 지키고자 했다. 통협의 통일운동은 원심창의 평화통일운동의 기본 정신과 사상적 원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원심창의 평화통일 이론은 민족자결의 통일에 대한 자각과 각오라는 주체성 확립, 그리고 민족자결·평화·민주주의·국제협조라는 사상적 원칙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정신과 원칙에 따라 원심창은 제3지역이라 할 수 있는 재일한인사회에서 통협을 결성해 마지막 삶을 통일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다. 통협은 해외 최초, 자발적으로 결성된 통일운동단체이며, 통협의 통일운동은 원심창의 통일이론과 방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원혁 이사장
항일영상재단

■ 기조발제
이원혁 이사장/항일영상재단

사실과 허구가 조합된 콘텐츠 기획 필요
팩트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에서부터 확산

독립운동가 선양사업도 디지털 기술혁명에 따라 선양 방식이 변화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에 최적화된 독립운동 콘텐츠를 개발해 한다. 독립운동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스토리를 발굴·개발하고, Fact와 Fiction이 조화를 이루는 탄탄한 구성이 필요하다. 앞으로 웹툰, 웹소설, 게임, 웹드라마 등 다양한 형태의 장르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원심창 의사 디지털 선양사업은 스토리 기반의 콘텐츠를 개발한 후 웹소설 등으로 2차 생산물을 확장하는 방법, 역사콘텐츠 전문가를 공유해 콘텐츠 기획과 제작, DB구축, 온라인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방법, 원심창 사이버기념관을 구축해 콘텐츠관, 복원영상관, DB관, AR·VR 체험관, 영상추모관 등을 통해 접근성과 정보 확산성을 높이고 살아있는 정보를 제공하며 재미와 감동을 주는 기념관을 구축하는 방법 등이 있다. 

 

▲ 김창덕 이사
국민문화연구소

■ 지정토론
김창덕 이사/국민문화연구소

원심창 의사가 처음 입학한 니혼대학 사회과는 청년 원심창이 아나키즘을 처음 접하고 이를 자신의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당시 니혼대학 사회과에는 정과 125명, 특과 206명 중 조선인 출신이 63명이나 되었다. 또한 원심창 의사의 투쟁활동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옥중 지원활동과 박열의 유지계승 작업도 있다. 특히 출판물 간행 경험은 중국에서의 활동과 해방 이후 활동, 사상의 폭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원심창 의사의 모든 기록물을 하나의 전집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지 궁금하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전집 발간은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한국의 아나키즘은 일본의 아나키즘과도 성격이 다른데 원심창 의사를 비롯한 이 시기 한국 아나키스트들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 김진웅
성균관대학교 박사과정

■ 지정토론
김진웅/성균관대학교 박사과정

항일구국연맹결성의 근거를 일제 측 보고서로 인용했는데 이 보고서에는 동시기 항일구국연맹이 결성된 게 아니라 B.T.P가 결성된 것으로 나와 있다. B.T.P를 항일구국연맹의 행동대로 보고 일제 측 자료의 B.T.P를 항일구국연맹과 같은 것으로 여긴 것 같은데 이것만으로 단체가 조직된 사실이 증명됐다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의거를 도운 중국인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이들의 행적을 조금 더 다뤄준다면 국제연대의 의미뿐 아니라 천진과 상해의거 위상도 제고될 수 있을 것이다. 천진일본총영사관저와 일본기선 투탄의거 사건 재구성에서 이용준과 유기석 회고록에 국한된 점은 아쉽다. 유기석 회고는 해방 후에 작성됐고, 원심창은 경찰 진술이라는 점에서 어느 한 쪽을 100% 신뢰하기 어렵지만 이 사건 직후 육삼정의거가 일어났으므로 사건을 다양한 시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 지정토론
김인덕 교수/청암대학교

원심창 의사는 해방 전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아나키스트로 민족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재일한인사회에서 통일운동에 전념했다. 그의 생에서 두 지점이 갖는 의미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재일조선인 사회 속에서의 원심창 의사의 이미지는 조금 다르다. 건동, 건총의 통합과 해산의 의미는 재일조선인 해방공간 사회를 보는 다른 눈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해산의 이미지와 원심창 의사의 역할을 재론할 필요가 있다. 해방공간 민단의 결성 의미는 원심창 의사 생애에서 활동가의 전면적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평가가 궁금하다. 원심창 의사의 평화통일론을 거론할 때는 각자의 위치에서 그 역할을 하자고 한 말의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의 평화통일운동의 본질은 다른 통일론이나 운동론과 다른 것인지 비교설명이 필요하다. 

 

▲ 김병기 학술원장
광복회

■ 지정토론
김병기 학술원장/광복회

최근 여러 독립운동단체에서도 기존 틀을 벗어난 새로운 선양사업 방법을 연구·기획하고 있다. 원심창 의사 디지털 선양사업 같은 다양한 콘텐츠의 독립운동가 또는 독립운동단체 선양사업이 개발될 때 어떠한 협업체제가 유용한지 궁금하다. 디지털 선양사업에 있어서 합리적인 가격 경쟁력을 제고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발표자가 복안을 갖고 있나. 향후 독립운동가나 단체 선양사업 외에 일반적인 한국사 역사 콘텐츠 개발에 대해 발표자의 고견을 듣고 싶다. 

 

 

정리/임 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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