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과 보쌈의 인연처럼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는 가족애 같은
세상이 그립다

 

   
▲ 권혁찬 전 회장
평택문인협회

이집 저집에서 간간이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것을 보면 분명히 김장철인가보다. 그런데 왜 고소한 수육 삶는 냄새가 나면 김장이 연상될까 궁금했다. 평소에도 보쌈이나 수육은 자주 먹는 메뉴임에 틀림없건만, 참 기이한 현상이다.

입동 절이 다가오면서 여기저기 김장으로 웅성거리는 무리가 종종 보인다. 코로나로 소원했던 가족 간의 우애도 더욱 돈독해지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오랜 우리 민족의 전통이자 필수 생계수단임에 의연해지지 않을 수 없기도 하다. 한해의 농사는 어쩌면 김장을 계기로 마무리되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곳간의 쌀과 장독의 고추장, 된장과 잘 익은 김치와 꽁꽁 언 동치미만 있으면 부자 부럽지 않았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지만, 아직도 냉장고 가득 쟁여놓은 겨울 채비 음식들이 많을수록 마음이 풍족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긴긴 겨울 빈 밭을 바라보며 저장해둔 음식만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유년. 버석버석 언 동치미 국물에 방금 해낸 시루떡의 감칠맛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어쩌면 몸속 깊이 박힌 유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화롯불 위에 보글보글 온종일 끓고 있던 된장찌개에 잘 익은 김장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보리알이 꽤 많이 섞인 찬밥을 볶아 밤참으로 주시던 할머니의 입맛은 평생 잊힐 수 없는 추억이 됐다. 새콤하게 익은 총각김치를 길게 집어 들고 잎줄기 부분부터 조금씩 잘라 먹기 위해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 킥킥거리던 어린 시절의 형제애가 지금까지도 우리 사 남매의 우애를 책임지고 있다. 매운 것보다는 시원한 동치미를 좋아했던 나는 지금도 그 식성이 그대로 이어져 하얀 백김치나 흰 보쌈김치를 좋아한다.

열무김치를 많이 먹어야 이가 튼튼해진다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지금도 열무김치를 접할 때마다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구수한 보리밥엔 열무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들기를 한 방울을 둘러서 비비면 최고의 영양식이라 하시던 말을 지금도 철석같이 믿고 살고 있다. 배추김치를 많이 먹으면 피부가 하얗게 예뻐지고, 열무김치를 많이 먹으면 키가 커서 튼튼한 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매운 고추장을 많이 먹으면 몸이 건강해져서 대장군이 될 수 있고, 너무 짜게 먹으면 목소리가 작아진다고 하셨던 말이 지금도 들린다.

아마도 그 어떤 경전의 말보다도 더 신성시됐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 근거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호한 말들이긴 하지만, 지금도 확신처럼 믿고 살아오고 있다. 그러고 보니 김장에 얽힌 우리 인생살이는 필수 불가분의 조건으로 엮인 것이 확실하다. 그런 연유로 인해 김장과 함께 입맛을 돋우는 돼지고기 보쌈이야말로 이 시대를 책임질 최고의 음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근거는 없지만, 일리가 있던 아버지의 말씀을 굴뚝같이 믿고 살아온 오늘 결코 잘못된 삶을 살지 않았다는 이 확신은 무엇인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사심 없는 마음에서 유래된 것이 틀림없다. 어떤 인과관계도 없지만, 김장과 보쌈의 인연처럼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는 가족애 같은 세상이 그립다. 생각만 해도 고소함이 연상되는 김장김치처럼 은근히 익어가는 인간애가 그리워지는 김장철. 김장을 마치고 따끈한 돼지고기를 삶고 있는 아내 옆에서 미소를 머금고 입맛을 다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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