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인가 싶었는데, 영동엔 때 아닌 폭설이 내렸다. 내가 사는 곳은 햇살이 따스하고 바람은 훈풍이다. 새벽마다 금광호수에 올라오는 물안개가 집 안팎을 감싼다. 매화는 일러 피지 않았다. 수련을 심은 연못에 며칠 내린 비가 흥건히 고였는데, 물속에 풀들이 파랗게 돋는다. 종일 새로 나올 책의 원고 교정을 마무리해서 출판사에 넘겼다. 그 책 나오기를 기다리며 다시 새 원고를 써야 한다. 달마다 써야 하는 원고가 적지 않고, 대학 두 군데에서 강의도 한다. 늘 몸이 지치지 않도록 조심한다. 들길 산책을 멈추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들판을 나가 걷을 수 있는 건 시골 사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들길 산책의 즐거움은 그것이 노동이 아니라는 것, 즉 무위의 일이라는 데에서 나온다. 나는 아무것도 탐색하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을 비우고 걸을 뿐.
몸을 휘감는 바람과 느닷없이 공중에 짧은 호곡(號哭)처럼 울음을 뿌리고 가는 새들과 옅은 색의 구름들이 나와 함께 걷는다. 흙은 도시의 아스팔트처럼 딱딱하지 않고 물렁물렁 하다. 그 물렁물렁한 감촉이 발바닥을 통해 머리까지 올라온다. 내가 그 무른 대지를 밟을 때 만유인력의 법칙은 나를 흔들리지 않게 잡아준다. 들길이 키우는 것은 감수성과 오롯한 사색이고, 무위 그 자체다. 들길을 걸으니 내 안에 축축하게 자리 잡은 비참과 공포는 마르고 사라진다. 논둑에는 벌써 쑥 같은 게 파랗게 싹을 내밀고 있다. 오오, 들녘 끝에는 누가 살든가. 화적떼가 살든가. 풀모기가 날든가.
법령이 늘면 도둑이 늘고, 정의를 부르짖는 자가 늘면 불의가 세상을 뒤덮는다. 도둑이 많아지고 불의가 세상을 뒤덮는다고 한들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내 몸가짐만 바르게 할 뿐이다. 세상과는 뜻이 맞지 않아 세상을 버렸으니 널리 용서하시라.
은둔하는 자의 마음은 세상의 소란스러움보다는 바람 소리, 물소리, 빗소리에 가 있다. “물에서 나는 소리에 네 가지가 있으니, 폭포 떨어지는 소리,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 여울물 지는 소리, 봇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그것이다. 바람이 내는 소리에 세 가지가 있는데, 솔바람 파도 소리, 가을 잎 지는 소리, 물결치는 소리가 그것이다. 비에서 나는 소리가 두 가지가 있으니, 오동잎과 연잎 위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처마를 타고 죽통 속으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그것이다.”(주석수, ‘유몽속영’)
백이(伯荑)와 숙제(叔齊) 형제는 은왕조(기원전 1700~1100년경) 말기에 작은 나라에서 군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둘 다 임금 자리를 마다하고 나라 밖으로 달아나 숨어버렸다. 무왕이 은 왕조를 무너뜨리고 주 왕조를 세웠다.
백이와 숙제는 주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연명하다가 이윽고 굶어죽는다. 백이와 숙제는 그 처신이 염결했다. 이백은 21세에서 23세까지 사천의 민산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작은 새들 천 마리가 주위에 모여들고, 새들을 부르면 기쁜 듯이 날아와 손바닥에 모이를 쪼아 먹었다 한다. 속세를 버리고 유유자적 살았던 이들을 떠올린다. 노자, 장자, 죽림칠현, 그리고 이백, 도연명……
제법 날이 길어졌다. 찬바람이 일며 옷자락을 흔든다. 이 들판에도 곧 어둠이 내릴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한다.
“나 하나/나 하나뿐 생각했을 때/멀리 끝까지 달려갔다 무너져 돌아온다//어슴푸레 등피(燈皮)처럼 흐리는 황혼(黃昏)//나 하나/나 하나만도 아니랬을 때/머리 위에 은하/우러러 항시 나는 엎드려 우는 건가”(박용래 , ‘땅’)
암승냥이를 잃은 숫승냥이처럼 혼자 들길을 떠돌며 도연명(365 ~ 427)을 생각한다. 도연명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돌아가련다./논밭이 묵으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노래하며 시골로 돌아갔다. 귀밑머리 희어지도록 가난하니 끼니 걱정이 그치질 않고, 아들 다섯을 두었으나 다 성에 차지 않으니 자식 걱정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래도 뜰 앞에 매화와 버드나무를 심고 꽃피길 기다리고, 술 마실 생기면 그때마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니 오늘의 사람과 성정은 다를 바 없다.
‘애정의 갈망을 가라앉히며’라는 시도 있다. 도연명도 짝사랑에라도 빠졌던 것일까.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기색이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배를 탔는데 노를 잃어버린 듯 하고/절벽을 올라가는데 붙잡을 게 없는 것과 같다”고 쓰고 있다.
그 중간 대목은 이렇다. 아주 긴 시다. 오동나무가 되어 네 무릎 위에서 울리는 금(琴)이 되고 싶구나, 했다. 나도 누군가의 무릎 위에서 울리는 거문고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가. 그래서 튕겨져 울리는 음률마다 누군가의 애간장을 끓게 했던가. 마음에 간절한 바는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예나 지금이나 연애에 빠진 사내의 모습이란 게 이렇듯 제 마음의 갈피를 다스리지 못한 채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일삼았구나, 하며 공허하게 웃는다. 나이가 적거나 많거나,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사랑에 빠지면 마음에 공연한 괴로움은 가득해지고 행동은 나날이 유치해지는가? 내 마음도 누군가 그리운 이를 품으면 물렁물렁해져 유치해질까? 분명 그럴 것이다. 아직은 어기차고 굳센 마음을 이어가고 싶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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