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쑥고개_03 |
‘쑥고개‘는 왜 퇴출당했을까?
▲ 이수연 한국사진작가협회 전 부이사장 |
■ 나는 송탄 살지 않아요
40년이라는 시간은 꽤 오랜 세월일 테다. 하지만 맴도는 기억 속에서는 바로 엊그제 같다. 하루에 상하 행 열차가 두 번씩밖에 서지 않던 송탄역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던 1980년대 초. 매일 같은 칸에서 만나다시피 하던 어느 여성의 충격적인 말이 가끔 떠오른다.
“나는 송탄 살지 않아요. 서정리 살아요”
서정리는 송탄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지역이자 가장 대표적인 마을이다. 송탄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1914년이지만 서정리라는 명칭은 1905년 경부선 철도부설 때부터 역을 개설하고 영업할 정도로, 나름 깊은 유서를 간직한 마을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송탄의 구성원으로서 자기의 모체를 부정하는 것은 ‘나는 경기도 살지 대한민국에 살지 않아요’와 같은 충격적 발언이었다.
이름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나타내는 정체성이라고 할 때, 당당히 밝힐 수 있다는 것과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그 여성은 자신의 고향 서정리가 속했던 송탄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이다 못해 불명예스럽기까지 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불과 5~6년 전인 197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송탄’은 기피 대상이 아니었다. 평택군 송탄읍으로서, 포괄적 지명이던 것이 1974년에 정식 출범한 송탄청년회의소가 ‘송탄으로 부르기’ 캠페인을 전개하면서 의도치 않게 파생된 일종의 부작용이다.
■ 송탄 바로 부르기 캠페인
송탄 바로 부르기 캠페인 이후 송탄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여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쑥고개’ 때문이다.
쑥고개가 숯을 지고 오르내리던 숯고개의 경음화라고 이미 말했다. 언제인지 알 수 없던 시절부터 그렇게 불리던 쑥고개는 6.25한국전쟁 와중이던 1952년에 미공군기지가 고개 멀찌감치에 터를 잡으면서 숯고개라는 의미 말고 또 하나의 상징성을 띠게 된다. 바로 ‘기지촌’이다.
서정리와 쑥고개는 불과 10리도 안 떨어진 거리였지만 도시가 이어지지 않은 당시는 서로 다른 동네였다. 1970년대 초 기억에 쑥고개에 놀러 온 이가 서정리 누군가와 통화를 하려면 전화국 교환수에게 시외통화를 신청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3개 시·군을 통합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북부로 지칭하는 송탄과 남부로 지칭하는 평택 그리고 서부로 지칭하는 안중의 거리 차이 만큼이라고 보면 될까.
읍사무소 소재지이자 전통 마을이던 서정리는 큰 변화가 없었던 데 비해 마을은커녕 변변한 집 한 채 찾아보기 힘들던 숯고개 일대는 연신 몰려드는 이주민들로 급격하게 커가는 신흥도시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그에 걸맞은 이름이 없었다. 결국, 오래전부터 불러오던 쑥고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동시에 순수하고 아름답던 고개는 조금씩 오염되어 갔다. 문학이나 영화 등을 통해 만날 수 있던 여러 기지촌의 실상이 결코 과장은 아닐 터. 전통 질서와 다른 서양문화의 범람, 풍성한 미군 물자와 소비, 특히 미군 클럽으로 대별 되는 향락이나 성적 문란 등등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곳만의 특징처럼 되었고, 이게 곧 쑥고개와 동의어이자 같은 개념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기에 송탄청년회의소가 전개한 캠페인은 당연하고도 당당한 것이었다.
하물며 송탄에 처음 생긴 은행인 상업은행은 오산지점이라고 간판을 달았으니 이런 것들을 바로 잡는 일은 절대 필요했다. 오산지점의 ‘오산’은 오산미공군기지라는 부대 명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쑥고개’와 같은 맥락의 부정적 단어였다.
전 세계 미군기지마다 오산으로 표기되었다는 부대 명칭을 빼고는 빠르게 쑥고개의 흔적을 지워갈 수 있었지만, 대신 그 자리를 ‘송탄’이 이어받았다.
아쉬움은 남는다.
광역적 명칭이던 ‘송탄’을, 국지적이던 ‘쑥고개’를 대체하는 데 쓴 것 말이다. 물론 당시의 ‘쑥고개’는 송탄에서 가장 큰 경제구역이자 인구가 밀집된 곳이며,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커다란 반대는 없었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놓친 게 있었다.
얼마 뒤 나는 어느 지면에 ‘버스차장을 안내양으로, 운전수를 운전기사로 바꾼다고 그들의 대우가 달라질까? 때 묻은 몸에 새 옷을 입히는 것보다 몸을 깨끗이 씻기는 게 우선이다. 아름다운 우리 이름만 잃을지 모른다’라고 썼다.
쑥고개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과정에서 부정적 이미지도 함께 퇴색했다. 그것은 인위적인 어떤 행동들보다 기지촌 의존형 도시에서 정상적 도시로의 중심 이동이나 우리의 생활과 문화가 다른 도시와 대등해지면서였다.
사라졌기에 더 그리워지는 이름이다. 이참에 ‘쑥고개라 부릅시다’하고 외쳐 볼까?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