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쑥고개_08

 

엘간 골목과 신중현과 ‘딱지’,
그리고 어느 여성의 ‘미국행’

 

 

▲ 엘간 골목(1991년). 부대 정문을 바라보며 맨 앞의 오른쪽 골목길 중간에 아르곤 Argon이라는 미군클럽이 있었다. 엘간 골목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는데 아르곤의 발음이 알간이다. 이 골목은 남산터까지 이어지는 긴 길이었고 엘간홀은 그 중간에 있었으나 영천호텔 아래쪽으로 가로질러 부대 울타리로 이어지는 새 길을 만들면서 홀이 있던 곳은 길이 되었다.

 

   
▲ 이수연
한국사진작가협회 전 부이사장

신장쇼핑몰은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초저녁 어스름한 무렵이 좋다. 잿빛 돌바닥의 무표정한 회색에 표정을 입힌 빗물이 가로등과 네온사인의 반사와 어우러지는 감성 때문이다. 거기에, 낯선 이방인이라면 아직 이곳이 기지촌임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양옆 상가의 이색적 모습은 더더욱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 평택오산미공군기지 초창기 시절의 미군클럽. 연도 위치 미상(인터넷 캡처)

 

■ 엘간 골목의 유래

신장 쇼핑몰에서 가장 이국적인 곳은 엘간 골목이다. 사진 찍는 지인들이 송탄을 방문했을 때 가장 흥미롭게 카메라를 들이대던 곳도 엘간 골목이다.

‘엘간’이라는 명칭은 이 골목 중간에 있던 미군 전용 클럽 이름에서 유래한다. 영어로는 아르곤 Argon이다. 원소기호 18번의 기체를 말한다. 그런데 왜 미군클럽 이름을 이렇게 정했을까? 아는 이들이 없다. 이럴 땐 엉터리라도 가설을 세워 보는 게 펜대 쥔 이의 특권일 터. 

아르곤의 어원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모든 걸 보는 자’ 아르고스에서 유래한 것이라니 간판으로 써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마침 컴퓨터 게임에 등장하는 어느 가상의 제국도 아르곤이다. 

그 아르곤을 컴퓨터는 ‘알간’ 또는 ‘엘간’으로 발음한다. 

60년대 중반까지의 기억에, 비 오면 질퍽하기가 보통 아니어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 못 사는 골목’이라는 푸념을 듣던 이 길은 멀리 남산터 다 가도록 좁고 포장 안 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일대 사람들에게는 ‘큰길’이었던 그 중간을 뚝 잘라 골목을 가로지르는 새 길을 내는 바람에 엘간홀은 사라졌어도 오래전, 달리 기억할 만한 게 없었던 이곳은 아직 ‘엘간’을 기억하고 있다. 

▲ 2007 당시의 엘간 골목의 어느 클럽. 종전의 내국인 출입 금지라는 표지 대신 유흥주점이라고 표기했다. 접객원을 두고 술을 팔며 노래나 유흥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이 유흥주점이다. 여기서는 외국인 전용 업소로 통한다.
▲ 좁은 골목길을 넓게 사용하는 생활의 지혜쯤 되는 모습이다. 영업 때는 세워둔 시설물을 펼쳐 테라스처럼 사용한다.

 

 

■ 내 기억 속의 홀Hall과 클럽Club

미군 전용 업소를 부르는 이름은 두 가지다. 홀과 클럽. 내게는 다섯 개의 홀과 하나의 클럽이 남아 있다. 엘간홀, OB홀, 에이프램홀, 바바조홀, 금강홀 그리고 스테레오클럽. 지금이야 ‘클럽’이 대세지만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던 1950~60년대만 해도 클럽은 ‘구락부俱樂部’로서 좀 더 품격 있던 사교의 장이고, 홀은 유흥업소였다. 

금강홀은 쑥고개 북쪽 초입의 탄현리 언덕이 막 시작되는 1번 국도와 경부선 철길 바로 사이에 있었다. 국도변 골목길에 있었는데 상당히 넓은 홀과 무대를 만들고 라이브 연주를 하던 곳이다. 영어 간판은 파이브 스포트 Five Spot다. 1960년대 초 유명 재즈 뮤지션이자 작곡가였던 에릭 돌피가 연주하던 곳으로 잘 알려진 뉴욕 어느 클럽의 이름과 같다.

바바조홀은 부대 정문에서 상당히 떨어진 외곽에 있었다. 금강홀이나 에이프램홀도 외곽이었지만 그보다 더 떨어져 지금의 지산동 행정복지센터 앞에 있었다. 지금이야 큰길 옆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쑥고개길 중간쯤인 좌동에서 구불구불 골목으로 내려가야 나오는 곳이었다. 철길 밖에 있던 이들 세 클럽은 흑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중학생 시절, 쑥고개에서 서정리 너머에 있던 학교까지의 그 먼 등하굣길은 오직 ‘걸어서’였다. 시내버스라는 게 없었고 그저 서울서 내려와 송탄을 거쳐 가던 완행버스가 정류장도 아닌 학교 정문에서 특별히 정차해 주던 시절인데도 버스에서 내리면 훈육 선생님의 단속 대상이었다. 그런데 자전거 통학은 가능했다. 자전거를 사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신문 배달은 구독자였던 엘간홀과 금강홀과 OB홀을 그렇게 기억하도록 했다.

▲ 엘간 골목의 어느 클럽.분위기로 보나 간판으로 보아 당시에도 남아 있던 흑인 전용 클럽인 듯하다.(1985년)
▲ 좌동 미군클럽의 옛 모습(1990년 대 초). 지금의 지산동행정복지센터 앞 부근이다. 이곳으로 오려면 부대 정문에서 경부선 철길을 넘어 쑥고개길 중간인 ‘좌동’ 언덕의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내려와야 했다.

 

■ 우리나라 록 음악의 전설 신중현과 쑥고개 

엘간 골목 입구 반대편이자 미군 부대 정문 앞에 있던 OB하우스(홀)는 우리나라 록 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신중현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유신정권 시절에 박정희 찬가를 만들라는 제의를 거절한 대가로 히트곡이 잇따라 금지당하고 이어서 대마초 공급책 혐의로 국내 모든 활동을 정지당한 신중현이 이곳에서 연주했다.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않던 미군 전용 클럽이기도 했지만, 이곳 미 공군기지에서 연주하다가 송탄에 땅을 사고, 이 거리에서 클럽을 연 그의 미8군 연주 동료 뮤지션들의 권유 때문이다. 중앙일보에 연재한 그의 회고록에는 어느 클럽이라고 밝히지 않았지만 바로 OB하우스가 그곳이다. 1977년 후반부터 1979년 사이의 일이다.

스테레오클럽은 가끔, 손님이 찾아오면 이색볼거리 제공 겸 면세 맥주 마시러 가던 곳이다.

예전에는 면세 주류를 취급하는 클럽 입구마다 내국인 출입 금지라는 표지를 붙였다. 그리고는 입구에 ‘기도’라고 부르는 문지기를 배치해서 한국인의 출입을 통제했는데 마침 그곳 사장과 안면이 있어서 무시로 출입하곤 했다.

처음 들어가 보던 당시에는 무대에서 비키니 차림의 스트립쇼를 했고, 시간이 지나자 무대에 굵은 스테인 봉을 세우고는 봉춤을 추었다. 내국인이 많이 드나들면 미군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통제를 많이 했어도 들어가면 그다지 나쁜 취급을 받지는 않았다. 미군들과는 달리 맥주를 궤짝으로 쌓아놓고 마시는 덕이랄까. 

▲ 신중현과 OB하우스(2022년). 나무로 외관을 장식한 2층 건물이 옛 OB하우스다. 유신정권의 박정희 찬가 만들기를 거부해 탄압 당하던 시절 신중현은 이곳에서 연주하며 생계를 꾸렸다. 노출을 꺼려 자기 이름도 악단 이름도 붙이지 않고 활동했다고 한다.

 

 

■ ‘딸라’와 딱지

쑥고개 시절 송탄의 경제는 달러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 수입의 상당수가 미군클럽에서 나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5, 60년대에 미군들이 사용한 달러가 사실은 군표라는 걸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군표는 미국이 발행해서 주둔지 미군에게 지급하던 일종의 유사 화폐다. 자국 통화량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주둔 국가를 통제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고 했다. 클럽 종사자들은 물론 지역에서도 실제 달러처럼 통용되는 주요 수단이었지만 가끔 예고 없이 기존 군표를 폐기하고, 신 군표를 발행하면 환전하지 못한 군표는 휴지 조각되기도 했다. 그 군표를 ‘딱지’라고 불렀는데 미국은 1973년에 군표 발행을 폐지했다. 

지금 대형 클럽들은 다 사라졌고, 내국인 출입 금지라는 표지도 없다. 대신 유흥주점과 일반음식점으로 구분해서 운영한다. 외관이 미군클럽처럼 생겼어도 ‘일반음식점’이면 누구나 출입할 수 있고 ‘유흥주점’이면 미군 전용이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미군과 동행해야 하나 호기심 나면 그냥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다, 입구에서 거절하는지 통과시키는지. 

▲ 이곳 사람들이 딱지라고 불렀던 미군 군표(1965년 발행. 이미지 사진, 인터넷 캡처) 실물을 딱 한 번 보았다. 부대 정문 앞 어느 세탁소 주인이 이상한 돈을 다림질하는 게 보여 무언가 물었더니 구겨진 ‘딱지’를 곱게 다리는 거라는 답변이었다. 미국 달러와 같은 크기, 같은 액면가로 발행했다.

■ 미국으로 가기 위해 클럽행을 선택했던 지인 여성

클럽의 변화는 종사자에게서도 알 수 있다. 술자리 접객 여성 있는 곳이 유흥주점인데 우리나라 여성은 다 사라지고 영어가 통하는 필리핀이나 백인인 러시아 여성들이 C4 단기 취업비자나 E6 장기 연예인 취업비자로 들어온다고 했다. 

그들이 우리나라 여성이 떠난 자리를 채우기 한참 전 일이다. 나를 오빠라고 부르며 따르던 이곳 어느 젊은 여성이 갑작스레 미국으로 떠날 거라는 예고를 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살아내려고 무던히 애쓰던 처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지 못했던 ‘미국행’ 이야기는 낯설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스테레오 클럽 입구에서 만났다. 나를 피하지 않았으면 몰라보았을 만큼 진한 화장에 조금은 화려하고 노출 심한 차림으로. 클럽에 나가면서 미군을 만나려 했던 거다. 그 후 그녀를 본 적도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여기까지가 내 기억에 남은 이곳 클럽의 전부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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