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쑥고개_09

 

어릴 적 추억의 보물창고 
삼보극장 길과 저녁 시장

 

 

▲ 가슴 아픈 사연의 꽃시장(1985년). 길 한가운데를 확장해서 소방도로로 개설하기 전 저녁 시장에서 꽃 팔던 모습. 도로 확장 후 길 한가운데를 차지하던 난전은 사라졌다. 이 사진을 본 쑥고개 사람들 모두 이 꽃의 사연을 알고 있었다. 먹고 살기 팍팍하던 당시에 가정에서 절화를 꽃병에 꽂고 살던 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매일 열리던 이 꽃장수의 소비자는 바로 미군 클럽이다. 이 꽃을 산 이는 몇 송이씩으로 묶어 클럽에 들어가서는 ‘플라워, 플라워’하며 미군에게 팔았다. 옆자리 시중들던 여성에게 꽃을 사 주라는 의미다.

 

   
▲ 이수연
한국사진작가협회 전 부이사장

■ 쑥고개 두 번째 번화가 

미군 부대 앞 상가 거리가 쑥고개의 제일 번화가라면 그 거리가 시작되는 부대 철길 바로 앞 ‘삼보극장 길’이라 부르던 골목은 두 번째 번화가였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 그 끄트머리에 삼보극장이 있었기에 그리 불렀지만, 사람이 많이 오가는 극장 말고도 길 좌우로 점포들과 상설시장이 있어서였다. 지금이야 보잘 게 없는 규모일 테지만 정문 앞 거리도 현대화되지 않았고 몇몇 클럽이나 건물 말고는 고만고만했던 1960~70년대 쑥고개 시절의 일이다. 이곳은 한국 사람들 전용 공간으로서 이곳 말고는 달리 형성된 상가가 없었기에 두 번째 번화가라고 부를 수 있었다. 

늘어선 점포와 시장은 길이 백여 미터에 폭 오십여 미터 정도다. 부대 철길과 붙어서 극장 앞까지 세로로 집 한 채 폭의 점포가 이어졌고, 그 앞으로 난 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다섯 겹의 점포와 주택이 가로로 놓였다. 

길 초입 왼쪽으로 안경집과 2층 식당, 몇 집 건너 병원(의원·醫院), 갈빗집 그리고 우리 집, 다시 한복집 겸 이불집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입구의 양품점, 두 번째 골목에 신장리사무소, 신발가게, 한 집 건너 선술집, 지물포, 그 옆 골목으로 몇 집의 옷 파는 가게, 골목 끄트머리에 식당, 극장 맞은편에 우리 집 옆에서 갈빗집 하다가 이전해서 순대 만들어 팔던 식당 등등이 기억에 남았다. 

길게 이어지는 왼쪽 상가 한가운데 있던 우리 집 옆으로는 철길로 나가는 골목이 하나 있었고 오른쪽 상가는 집 한 채 마다 골목을 끼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첫 번째 골목에, 지금은 물려받은 송탄부대찌개의 원조 식당이 있다. 

▲ 삼보극장 길(2022년). 백 미터 남짓한 이 골목은 쑥고개에 사는 내국인들의 전용 공간으로서 1960~70년대만 해도 정문 앞 거리에 이어 두 번째 번화가였다.
▲ 삼보데파트(2020년). 옛 삼보극장 터에 주상 복합용도로 지은 건물이다. 사진 오른쪽으로 저녁 시장이라 부르던 헬로마켓, 평택 국제중앙시장 간판이 보인다. 송탄시장에서 어느 날 바뀐 이름이다. 이 시장의 닉네임이 헬로마켓인데 ‘헬로’는 미군을 의미한다. 시장 간판 앞쪽이 극장 앞 공터로서 또래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 동네에서 제일 큰 건물 삼보극장과 시장 골목의 추억

단층이었지만 이 동네에서 가장 큰 삼보극장의 야간 조명은 놀 곳 없던 또래 동무들의 밤을 유혹했고, 우리는 여기서 땅따먹기며 비사치기(비석치기)며 자치기를 했다. 놀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꺾이고 도는 구석이 많아 숨바꼭질과 깡통차기에 ‘딱’이던 시장 골목이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만한 골목에 비 온 뒤면 질척해진 땅을 파고 질퍽한 흙을 부었다. 그 위에 마른 흙으로 살살 덮으면 훌륭한? 고무다리 함정이 되었고 누군가가 ‘메기잡기’만 기다렸다. 

이런 장난이 시들해지면 극장 길은 다시 ‘여우야, 여우야’ 놀이나 ‘우리 집에 왜 왔니’를 부르던 놀이터로 변했고, 해가 설핏 기울 때쯤 누군가의 엄마나 누나가 밥 먹으라고 부르러 와야 비로소 끝났다. 

정말로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동갑이나 한 살 터울로 가득했던 골목길 동무 중 나와 몇 녀석은 병원 현관에 붙은 ‘요비링(초인종)’을 누르고 달아났다. 응급환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몇 번 속아 나와 보던 간호원 누나도 시큰둥해질 무렵 그쳤던 장난이다. 

그 무렵의 어른들은 왜 그리 바빴고 집 비우는 날이 많았을까. 어느 밤, 부모가 출타한 그 골목 동무네 마루에서 ‘세, 세, 세 아침 바람 찬 바람에~ ’하는 손뼉 치기 하다가 갑작스러운 정전을 맞기도 했다. 그 동무는 침착했다. 불과 몇 초 후 전등이 다시 켜지면 양초를 찾았다. 정전 예고인 것을 알았던 거였다. 그리고는 이내 전기가 또 나가고 우리 놀이도 거기서 끝났다. 60년대 소도시의 전기 사정은 한동안 이랬다. 

아버지 마흔넷 어머니 마흔 연세의 다섯째 막둥이였던 내가 어려서부터 들은 말은 ‘자기 먹을 건 자기가 갖고 태어난다’였다. 그렇듯 궁핍한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는 방법은 상가 끄트머리 골목의 식당 친구네 집에 가는 것이다. 유난히 침을 많이 흘려 밥상에 미꾸라지 반찬이 빠지지 않던 녀석의, 책상 있는 안방은 내게 도서관이었다. 엎드려 뒹굴뒹굴, 같이 책을 읽다 보면 동무는 어느새 자고 있었고, 내 다리는 녀석의 책상 밑으로 들어가 있었다. 

초등학교 오륙 학년 수업 때 담임 선생님이 무언가 처리할 일이 생기면 두 명을 불러냈다. 글씨 잘 쓰는 친구는 자습할 내용이 적힌 참고서 한 권을 받았고, 나는 친구가 그걸 칠판 가득 옮기는 동안 90명이 넘는 아이들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그 바탕은 지금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동무의 안방에 가득하던 동화며 어린이 소설이다. 

한꺼번에 십여 명이나 뛰고 소리 지르고, 숙제 대신 책가방 팽개치고 노는 궁리만 해도 어느 어른 하나 ‘시끄럽다 들어가서 공부하라’라며 소리치지 않던 골목길의, 고맙고 아련한 추억이다. 

 

▲ 저녁시장에서 과일을 사는 미국인(1985년). 극히 이례적이지만 과일이니까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 신장육교 아래 (1980년대 중후반). 1976년에 미군 부대 우회 진입로로 개설한 신장육교의 등장은 기존 정문 앞 큰길에서 육교로 이어지는 소방도로를 잇달아 개설했다. 이 영향으로 삼보극장 길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 저녁시장과 헬로마켓

삼보극장 길은 극장에 막혀 끝나지만, 왼쪽은 부대 철길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경사진 길을 따라 한 단 낮은 ‘저녁시장’으로 이어진다. 부대 정문과 극장 길 사이의 우묵한 논바닥을 돋워 긴 정문 길을 만든 터라 시장은 마치 분지처럼 생겼다.

그 시장에서 새로 생긴 장터라는 ‘신장동新場洞’이 유래했지만 ‘신장’이라는 이름 대신 ‘저녁시장’으로 불렀다. 경부선 철길 아래쪽, 터미널 뒤편에 송천시장(지금의 송북시장)이 막 형성되면서 청과와 어물전 중심으로 새벽부터 아침 사이에 반짝 열리던 ‘아침시장’과 구분하던 이름이었다. 기지촌이라는 특성상 저녁시장은 낮부터 저녁 사이에 활성화되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4일과 9일에 열리는 오일장을 빼고는 규모가 아주 작았고 몇 안 되는 건물은 대부분 목조였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가 1960년대 중반의 어느 여름, 시장에 물난리 났다는 말에 놀라서 가보니 난데없는 보트가 시장 골목에 둥둥 떠다녔다. 유례없는 홍수로 시장 배수로가 황구지천과 진위천의 역류로 막혔기 때문이다. 시장 골목에 뜬 보트는 미군의 유원지 역할을 하던 ‘파라다이스’ 앞 저수지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이후 또다시 보트를 볼 일은 없었다.

 내 아련한 골목길의 추억은 여기서 끝난다.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집을 빚에 넘기고 이사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고등학교 시절 운동화 사러 가끔 들릴 때마다 시장은 변하고 있었다. 골목길 신발 가게서 사 신던 말표 검정 고무신 대신 시장 안 왕자표 운동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던 시절, 시장 외곽의 논바닥이던 곳에 대형 천막을 치고 어느 가구점이 장사를 시작하는가 하더니 시장은 금세 커졌다. 1960년대 말 70년대 초쯤 아닐까 싶다.

부대 진입 우회로인 신장육교의 등장도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큰길인 정문 거리에서 육교로 이어지는 소방도로를 잇달아 개설했고, 이는 쑥고개의 두 번째 번화가였던 삼보극장 길의 쇠퇴로 이어졌다. 1980년대 초반, 폐관한 삼보극장을 일본식 영어인 데파트로 신축하고 쇼핑과 다방, 요식업종 건물로 재개장했다. 당시까지는 유동 인구가 어느 정도 있어서 지하의 삼보다방에서 송탄사우회 사진전을 열기도 했지만,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교회가 들어서고 주거 용도로 바뀌었다. 

저녁시장은 쑥고개가 송탄시로 승격된 뒤 송탄중앙시장이 되었다가 2014년에 난데없이 ‘평택 국제중앙시장’이 되었다. 이 시장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육성한다며 중앙정부에 예산을 신청할 때 행정지명이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랬다. 졸지에 송탄의 중앙에서 평택의 국제적 중앙이 된 것이다. 외부 기획단의 제안과 인력이 주축이 된 이 시장육성사업은 미군 한 명 안 들어오던 재래시장을 미군 관광 시장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지만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고 ‘헬로마켓’이라는 닉네임만 남겼다. 

최근 들어 시장 반대편의 남산터 마을 일대에 오피스텔 등 주거시설이 급격하게 들어서면서 자리를 뺏긴 작은 규모의 미군 상대 요식업소들이 이 시장으로 하나둘 들어오고 전국적으로 골목 관광이 유행하면서 비로소 외부 여행자들도 이색지대를 찾아와 시장까지 둘러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만이 해답이다.

▲ 시장 중앙통(1980년대 중후반). 방역차의 소독약 분무를 좇는 아이들 모습에서 어릴 적 삼보극장 길로 지나던 미군 지프차의 휘발유 냄새를 따라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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