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가 날던 충혼산

산 아래에 있는 한광학교 교가도 충혼산 기슭에 진리를 심어… 로 시작을 하는 충혼산. 하지만 지금은 제 이름을 찾아서 덕동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덕동산’ 이라고 부르면 ‘춥고 배고프던’ 시절 충혼산에 얽혀있던 정겨운 이야기 맛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니까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주세요’라고 시켜야 입안에 감칠맛이 돌지 ‘자장면 주세요’하면 퉁퉁 불어터진 짜장면이 나올 것 같은 느낌과 같은 것입니다 .

지금은 재건축을 해서 ‘롯데캐슬’ 아파트단지로 변한 주공1단지 아파트. 1980년대 초 주공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 땅은 넓은 자두밭이었습니다. 어른 주먹만 하게 커진 자두가 보얗게 서리가 앉은 듯 잘 익으면 향기를 덮을 과일이 없었습니다. 우리말로는 ‘오얏’이라고 하지요.
-성씨가 어떻게 되세요?
-오얏 리李예요
그런데
-오얏이 뭔지 아세요?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금세 얼굴이 빨개집니다. 입으로만 ‘오얏 리’ ‘오얏 리’ 했지 정작 오얏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얏? 뭐 호두나 밤처럼 까먹는 건가? … 그 오얏이 바로 자두입니다. 그 자두 밭을 갈아엎으면서 충혼산은 허리 한 귀퉁이가 잘려나갔습니다. 그 탓에 충혼산 기슭 참나무에서 자라던 사슴벌레도 풍뎅이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반딧불이 까지 멸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밤이면 충혼산 반딧불이가 하늘에 별처럼 날아오르곤 했지요.

1970년대 초. 점심시간에 철조망을 넘어 충혼산에 올라가서 놀던 아이들이 어디에선가 온 몸에 붉은 털이 난 황금박쥐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황금박쥐는 멸종위기 동물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뭐야? 뭐야? 하면서 갑자기 아이들이 까맣게 몰려들었습니다.
황금박쥐. 이미 1968년부터 동양방송 TBC TV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일합작 애니메이션 ‘황금박쥐’가 연속극으로 방송되었기에 ‘황금박쥐’는 낯익은 동물이었습니다. 야행성 동물인 황금박쥐는 낮이라 그런지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잡혀온 것입니다.
-어디서 잡았어?
-충혼산이요
충혼산에는 박쥐가 살만한 으슥한 건물이나 동굴이 없습니다. 그런데 충혼산 어디에서 황금박쥐가 살고 있었을까요? 썩어서  속이 빈 나무 등걸에 숨어 있다가 잡혀 온 것일까요?

송홧가루가 보얗게 날리는 봄이 시작되면 학생들과 함께 충혼산에 올라가서 수업을 했습니다. 물론 체육시간에도 교실을 벗어나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지만 미술시간은 자연을 보며 생각하는 정서가 있는 시간입니다. 야외수업! 명목은 봄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었지만 그림은 뒷전이었습니다.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학창시절의 봄날. 바깥바람을 쏘이며 조용한 곳을 찾아 친구와 함께 서로의  갈등과 고민을 이야기 하고 생각을 나누는 일은 그 시기 어느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었을 것이지요.
가끔은 충혼산에서 예비군 훈련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비군훈련을 받으러 온 예비군은 훈련을 받기 전에 머리검사부터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불문곡직 , 아연실색 , 황당무계 , 허무맹랑 … 이런 표현이 어울릴까요? 충혼산에는 선량한 백성들 머리카락이 윤 4월 송홧가루처럼 바람에 날렸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왜놈들은 이 땅에 들어와 1895년 조선백성을 마치 제 나라 하인취급을 하며 조상대대로 길러온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내립니다. 조선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짓이었습니다. 오두가단 차발불가단 吾頭可斷 此髮不可斷. ‘신체발부 수지부모’니  내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머리를 자르지 말고 차라리 내 목을 잘라라  라며 선비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70년 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창씨개명을 한 ‘다카기 마사오’는 왜놈들과 똑같은 만행을 저지릅니다. ‘장발단속’ 백성을 잡아다가 털을 깍는 짐승 취급 하는 치가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마음까지도 가난해서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10월 유신 아침 일찍 산에서 이슬을 맞으며 내려오는 사람, 바짓가랑이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은 간첩일 수가 있으니 모두 경찰서에 신고하면 상금을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무고한 시민들도 마구잡이로 잡혀가기에 아침에 운동을 하러 산에 가고 싶어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간첩으로 몰리던 황량하고 서글픈 충혼산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 학교공부가 끝나면 선생들은 학생들을 앞세우고 안중으로 원곡으로 등록금 독촉을 하러 다녔습니다. 없어서 못 내는 돈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입니다. 젊은 선생들이 뒷전에서 모여 불만을 이야기 하면 영락없이 불려가서 ‘심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을 못내 학교에 가기 싫은 예민한 아이들은 충혼산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아이들은 두세 명씩 가방을 든 채 종일 산에서 방황했습니다. 좋은 학교를 가겠다고 돈을 들이며 학원을 다니는 지금과 달리 돈이 없어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과 40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나간 일은 왜 이렇게 그립기만 한 것인가요?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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