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강릉농악

 

마을농악의 역사,
강릉농악으로 이어가다

 

역사적으로 단오제와 함께 성행한 영동지역의 대표 농악
상쇠 박기하 활약으로 주목,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서수희 강릉농악보존회장, 무형문화재 전승 지원 확대해야

 

 


농악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행해지는 대표적인 민속예술이자 종합예술이다. 1966년 진주삼천포농악을 시작으로 다양한 지역의 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 또는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보존·전승되고 있으며, 2014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됐다.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평택농악은 평택의 대표 문화유산 중 하나다. 평택시는 주한미군 이전과 평택항 개발 등을 발판 삼아 국제도시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자원인 평택농악을 잘 활용할 책무가 있다.
지역의 역사를 담고 있는 전통문화유산이자 살아있는 문화 평택농악. 평택농악을 잘 전승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평택시사신문>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국 8대 농악’의 현황을 취재해 농악의 전승 역사와 운영사례를 살피고, 농악을 비롯한 전통문화자원의 보존·육성 방안을 지역사회와 함께 고민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 제27회 필봉마을굿축제에서 연희중인 강릉농악보존회

 

■ 오랜 기간 단오제와 함께 성행하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의하면 동예국에서는 시월 무천제가 열렸는데, 이때 밤낮으로 음주가무하며 신을 경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때 강릉 하서군악으로 덕사내라는 음악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강릉오독떼기 민요와 상관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가무들이 모두 우리 지방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음악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는 신라 사람들이 지방별로 특색 있는 가무놀이를 했음을 보여주며, 이들이 즐긴 민속가무의 춤가락이나 노래에는 그들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됐다. 풍작을 바라거나 경축하는 민속놀이 마당에서 진행된 신라의 민속가무에는 피리 등 관악기와 북, 요고, 징과 같은 타악기가 반주 수단으로 쓰였다.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 성현의 <강릉동헌>에 실린 한시에는 15세기 소고악이 연주되었음을 방증하는 내용이 있다. 성현은 <강릉동헌> 시 구절에 마을마다 퉁소와 북소리 풍년을 즐긴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소고악이 진행된 강릉지역 마을마다 풍년 축하 농악이 진행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강릉단오제 음악에서 악기가 연주된 것은 조선전기 학자이자 생육신 남효온의 <추강집>에서 영동민속이 언급된 것을 보면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희악으로 전승된 것은 17세기 허균이 김유신 장군이 대관령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쓴 <대령산신찬병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원농악은 악기 편성이나 음악, 판굿의 구성을 살폈을 때 원주, 횡성, 춘천 등지의 영서농악과 강릉, 삼척, 평창, 고성, 양양 등지의 영동농악으로 나눌 수 있다. 영서농악은 경기농악과 특징이 같고, 이와 달리 영동농악은 특유의 향토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는 태백산맥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강릉은 지역적으로 단오절 행사의 역사가 깊고 그 이름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농악 역시 단오절 기간에 많은 연주가 행해진 것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농악이 축제의 흥을 돋우고 어울려 노는 역할뿐만 아니라 농악대 간에 연주 기량을 겨루는 대회로 자리를 잡은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치 않다. 농악대 수가 많으면 경연 형식도 대회도 자연발생적으로 이뤄졌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일제강점기에도 유명해 당시 신문에도 단오절이면 강릉의 소식이 전해지는 경우가 상당했다.

1928년 <중외일보>는 6월 30일 자에 단오놀이 경기 결과를 소개했는데, 말미에는 농악대 시상내역이 있어 농악대회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9년 관동단양운동대회에서 2등 상을 받은 옥천동농악대 사진도 전해지고 있다. 관동단양운동대회는 1928년부터 개최돼 1936년 한 해 중단되었다가 다시 열리는 등 10년간 지속되었다가 일제가 중단시켰다. 1938년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강릉농악경연대회만이 개최됐다.

<대한매일신보>의 여러 기사에서도 풍년제 농악대를 소개해 농악대회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전했다. <동아일보> 강릉지국 염근수 기자가 농악대 대표와 인터뷰하는 가운데서도 드러난다. 기자는 자신이 국내 여러 곳을 다녔으나 강릉만큼 농악대를 위해 힘쓰는 곳이 없다고 표현했다. 해마다 단오 때면 농악경연대회를 열어 상을 주는 것이 놀랍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 제27회 필봉마을굿축제에서 연희중인 강릉농악보존회
▲ 제27회 필봉마을굿축제에서 연희중인 강릉농악보존회
 

 

■ 마을농악 역사의 산물 ‘강릉농악’

상쇠 박기하는 1948년 ‘왕산농악대’를 이끌고 이승만 박사 대통령 취임식 때 이화장에서 축하공연을 했다. 공연 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꽹과리를 선물 받고 농악에 힘써달라는 격려를 받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경축행사에 ‘강릉유천농악대’가 강원도 대표로 참가한 것이 강릉농악의 부활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농악이 원래 모습을 갖추기 어렵게 했지만, 1958년 제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권태경 상쇠가 ‘월호평농악대’를 이끌고 참가하면서 강릉농악의 발판을 마련했다. 강릉농악은 1961년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국가적인 공식 행사에서의 수상은 강릉농악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강릉농악은 1962년과 1963년 제3회, 제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연속으로 참가했고, 이를 계기로 강릉단오제에 ▲옥계 ▲남양리 ▲월호평동 ▲사천면 ▲왕산면 ▲장현포 ▲경포 지역 농악대가 참가해 농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왔다. 이러한 열의로 1969년 대구에서 열린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는 강릉농악이 장려상을 받았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고 미신타파라는 명목으로 전통 민속음악까지 움츠러들게 됐다. 강릉농악은 1972년과 그 이듬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공로상을 받은 것이 대외 활동의 전부였다. 이러한 이유로 강릉단오제에 참가하는 농악대가 지속해서 줄어들자 숙박협회장 이성실과 고물상협회장 김원익이 뜻을 함께해 홍제동농악대에 송아지를 사주는 등 농악 부흥에 힘썼다. 이를 계기로 숙박협회는 농악경연대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대회는 2회 차를 끝으로 막을 내렸고, 소수 농악대만이 명맥을 유지했다.

강릉농악 상쇠 박기하는 1977년 수원에서 열린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평창백옥포농악대’를 이끌고 참가해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춘천에서 열린 대회에는 평창농악을 이끌고 참가해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박기하는 주목을 받게 됐으며, 전문가들은 강릉농악의 특성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이 주최하고 한국문화인류학회가 주관한 <강원도민속종합보고서> 사업의 일환으로 강릉농악 상쇠 박기하에 대한 대담 기초조사가 이뤄졌고, 그 결과물이 <한국민속종합조사 보고서> 제8책 강원도편 민속예술에 강릉농악으로 실렸다. 이후 문화재연구소 발주로 시행된 강릉농악 조사 결과가 보고서로 작성됐다. 당시 강릉 ‘홍제농악’은 12회에 걸친 구술·시연 조사 작업을 거쳤다. 당시 홍제동농악대 인원이 계속 줄어들자 시연 과정에 경포동농악대가 참여하기도 했다. 결국 농악조사보고서가 당국에 상정됐고 홍제농악으로 지정 추진되었던 강릉농악은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며, 동시에 상쇠 박기하는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강릉농악은 1985년 12월 1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1-라호’로 지정받았다. 앞서 1984년에는 강원도무형문화재 제3호로 등록됐지만, 국가무형문화재 지정과 동시에 취소됐다. 강릉문화원은 1986년 강릉농악의 효과적 보존·전승을 위해 강릉농악보존회를 구성했다. 1989년 12월 1일에는 사천농악 출신 상쇠 김용현이 강릉농악 예능보유자로 추가 지정됐다. 사천은 과거 명주군 행정구역으로 명주군은 지난 1995년 강릉시와 통합됐다. 1990년대 강릉농악은 전승체계를 확립하면서 대외적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으며, 나아가 국제적 교류까지 확립했다. 강릉농악보존회는 1994년부터 강릉지역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어린이농악경연대회를 열어 전승체계를 형성했다. 대회에는 매년 6~7개 팀이 참가했으며, 농악 저변 확대에 공헌하고 있다. 강릉농악 예능보유자 김용현은 지난 2003년, 박기하는 지난 2017년 별세했다.

 

 

 

■ 농경생활 재현한 농사풀이농악

강릉농악은 강원도 태백산맥 동쪽에 전승되어 오는 대표적인 영동농악이다. 농경생활을 흉내 내어 재현하는 농사풀이가 있기 때문에 농사풀이농악이라고도 한다. 유래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강릉농악은 농기, 쇄납(날라리),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 법고, 무동으로 편성된다. 연주자들은 흰 바지저고리에 홍·청·황의 삼색띠를 두르고 무동들은 여러 가지 색깔이 섞인 옷을 입는다.

강릉농악에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3~4일간 농악대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농악과 고사를 하는 지신밟기, 마을의 공동기금을 걷기 위해 걸립패로 꾸며 농악을 하는 걸립굿, 모심기와 김매기 등을 할 때 하는 김매기농악, 질먹기, 건립굿, 봄철 화전놀이 등이 있다. 특히, 다른 지역에 없는 달맞이굿, 다리밟기굿, 풍어제와 관련한 진대백이굿이 있다. 두레농악이라 할 수 있는 김매기농악과 질먹기, 길놀이농악이 있는 것이 특색이다.

강릉농악의 놀이는 마을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12개 과장으로 이뤄진다. 놀이과장은 ▲두루치기를 시작으로 ▲성황굿 ▲멍석말이 ▲지신밟기 ▲십자놀이 ▲황덕굿 ▲논갈이, 모판누르기, 볍씨뿌리기, 모찌기, 모내기, 콩심기, 논매기, 낫갈이, 벼베기, 벼광이기, 벼타작, 벼모으기, 방아찧기 등 농사풀이 ▲자매놀이 ▲오고북놀이 ▲굿거리 ▲동고리받기 ▲열두발 상모 ▲장구통놀이 ▲여흥놀이 순서로 진행된다.

강릉농악은 단체적인 놀이를 위주로 해 농사의 고달픔을 잊고 서로의 화합과 마을의 단합을 도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지 현재 강릉농악보존회에는 ▲강남동농악대 ▲경포동농악대 ▲교동농악대 ▲달맞이농악대 ▲사천하평농악대 ▲성덕동농악대 ▲홍제동농악대 등 7개 산하 마을 농악대가 존재한다. 이 또한 강릉농악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인터뷰-서수희/강릉농악보존회장

 

“무형문화재 전승 지원 확대해야”

 

 

서수희(58세) 강릉농악보존회장 올해 7월 임기를 시작했다. 강원도 횡성 출신으로 원래 농악에 매료되었던 그는 결혼 후 강릉에 정착하면서 강릉농악을 알게 됐고, 뒤늦게 회원으로 농악을 시작해 29년째 활동하고 있다.

“늦게 배우다 보니 남들보다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대학에서 공연예술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 취득 후 박사 과정까지 수료했죠. 보존회 활동과 학업, 가정생활을 병행하기가 힘들었지만, 남편의 배려로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2001년 강릉농악 이수자로 지정된 서수희 회장은 2014년 전승교육사가 되면서 후학 양성에 많은 신경을 써왔다. 다른 보존회장들과 비교했을 때 경력은 짧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해왔다.

“농악에 적성이 맞아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학 양성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죠. 문제는 농악을 전승하려는 젊은이들이 없다는 점인데, 이를 극복하고 아이들이 농악에 쉽게 재미를 붙일 수 있도록 여러 방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농악 전승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물가 상승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낮은 공연료와 전승지원금이 문제를 가중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60여 명의 회원이 활동 중인 강릉농악보존회의 경우 지원금은 최소 운영비 정도만 받고 있으며, 대부분 공모사업과 공연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공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지만, 최저생계비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죠”

서수희 회장은 현대문화예술과 유형문화재로 집중되는 지원이 무형문화재를 전승하는 이들에게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단체종목의 경우 처우가 굉장히 열악해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문제는 예능보유자 지정 현황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충원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혔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경우에요. 향후 예능보유자 추가 지정을 위해 여러 단체와 연대할 계획입니다”

 

 
▲ 글·허훈 기자
편집·김은정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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