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신시가지_01

 

송탄시청 앞 신시가지 전성시대

 

 

▲ 송탄시 승격 후 5년 동안의 읍사무소 청사 생활을 마치고 1986년에 개청한 송탄시 청사 앞 대로변 풍경(1987년).

 

 

   
▲ 이수연
한국사진작가협회
전 부이사장

■ 송탄 신시가지 시대 개막

평택군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되면서 쑥고개 전성시대는 서서히 저물어 가고 외곽의 부락산 아랫자락에 개발한 신시가지 시대가 막을 열게 된다. 

셋집살이하던 내가 그곳에, 작지만 어엿한 내 집을 마련해서 입주한 건 1987년 가을이다. 서정동 산 800번지에 신축한 송탄시청에서 살짝 비켜 앉은 곳으로서 막 신시가지를 조성하던 무렵에 지은 주공아파트다. 규모랄 것도 없는 작은 평수지만 그래도 이 아파트는 당시 꽤 번듯하고 제대로 된 아파트라고 알려진 것에 비해 부근에 편의 시설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다행히 아파트 뒤쪽으로, 시가지와 도로 개설로 부락산 줄기가 끊기기는 했지만 오래 보존된 참나무 숲과 경기도립 도서관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었다.

송탄시가 5년여 기간의 읍사무소 청사를 청산하고 새집으로 이사 온 것은 1986년이다. 1981년에 시청이 들어설 서정동 일대의 토지구획 정리사업 확정과 1984년에 막 탄생한 송탄시 도시 기본계획 승인 직후였기에 청사가 들어섰다고는 해도 그 일대는 허허벌판에 가까웠다. 이사 간 직후 내 어린아이들 손잡고 돌아보며 한 생각은 언제 이곳에 건물들이 들어서나 하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는 빠르게 시청 앞은 변해갔다. 

남쪽으로는 평택서 올라오는 국도 1호선이 지금의 장당동 홈플러스 앞에서 당시 중앙대학교 실습농장 자리를 지나 동구재를 끊으며 오른쪽으로 갈라져 송탄시청 앞으로 지나갔고, 한국주택공사는 시청사 북쪽에 2단지 아파트와 주둔 미군을 위한 연립 아파트를 지었다. 동시에 시청 앞으로도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송탄 최초의 계획도시인 시청 앞 신시가지는 시청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송탄시 출범 이듬해에 세운 충혼탑 일대의 야산, 왼쪽으로는 경기도립인 평택교육도서관 앞까지 그리고 시청 앞쪽으로는 경부선 철길까지다. 

충혼탑은 평택군을 망라하여 한국전쟁 때의 희생 영현을 모신 비전동 소재 충혼탑에서 송탄 연고 영현만 따로 모신 탑이었다. 동구재와 이어진 작은 산 정상쯤에 있다. 이 일대는 단독주택지 위주로 개발했다. 반면에 경기도립도서관 앞까지는 공동주택인 아파트 지구다. 그리고 시청 앞으로 시원하게 뚫린 대로변은 비즈니스 권역이라고 할 상가로 형성되었는데 전체적으로는 시청을 중심으로 하는 대칭 구조쯤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은 형상이다.

▲ 신시가지 초창기 모습(1987년). <사진 왼쪽> 송탄시 승격 직후인 1982년 송탄문화원 주도로 한국전쟁 희생 영현을 모신 충혼탑이 멀리 산 정상에 보인다. <사진 오른쪽> 송탄시청 앞 대로 이면에서 본 시청 쪽 방향. 사진 상단 우측으로 송탄시청이 약간 보이고 중앙 흰색 건물이 지으려다가 중단한 관광호텔 자리이며, 그 위의 작게 보이는 건물이 송탄여자중·고교다.
▲ 1994년 송탄시청 앞 일대. <사진 왼쪽> 시청 앞 대로변 풍경. <사진 오른쪽> 송탄등기소 네거리에서 오산 방향으로 본 풍경. 사진 왼쪽으로 버스가 주차한 곳이 등기소 예정지이다.
▲ 송탄시청 앞 국도 1호선(1994년). 부락산 아랫자락에 조성한 신시가지 중 시청 앞을 지나는 국도 풍경이다. 화면 배경이 부락산이며, 그 아래에 지금의 라온중·고등학교, 교회 십자가 오른쪽에 예식장으로 변신한 미완성 관광호텔 건물의 하얀 굴뚝이 보인다. 산 능선 오른쪽 끄트머리에 송탄시청이 있다. 이 일대에 심은 가로수는 메타세쿼이아였는데 바늘 같은 이파리가 하수구를 막는다는 민원 때문에 베어버렸다. 현재는 포스코 아파트 앞 도로 양편으로 300미터 정도만 남았다.

 

 

■ 점촌과 지장절 사이

신시가지 조성지를 부락산 아랫자락이라고 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곳을 점촌 혹은 지장골, 지장절이라고 불렀다.

점촌은 국도 1호선 2차로의 좁은 모습으로 경부선 철길과 나란히 붙어 달리던 도로 옆에 있었다. 지금의 서정동행정복지센터와 서정리역 중간 동쪽 야트막한 비탈 일대를 일컫는다. 

기록에 따르면 1920년대 어느 개인이 옹기를 굽기 시작 한데서 이름이 생겼다고 알려졌으니 오래된 마을은 아니다. 중학교 시절 3년 동안 걸어서 이 점촌 앞길로 다녔다. 미술 시간에 쓸 흙이 필요해서 옹기를 굽던 분에게 조금 얻으러 갔을 때 커다란 독을 유약 통에 담가, 한 바퀴 굴려 꺼내어서는 손가락으로 표면에 쓱 하고 몇 번 문질러 멋진 풀잎을 그리던 기억은 아직도 새롭다. 

점촌 앞쪽은 일대가 철길 접도구역이어서 집이 없었고 지금도 그 구역은 철길 방음벽을 뒤로해서 동네 주차장 시설 등으로 남아 있다. 

점촌이 넓은 면적을 부르는 이름이라면 지장골은 경기도립도서관 일대 부락산 입구 아래쪽을 일컫는다. 전해 내려오기를 임진왜란 무렵 소실된 절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신시가지 개발 당시에는 경기도립도서관 아래쪽에 같은 이름의 절이 있었다. 주공2단지 아파트를 재건축하면서 그 절도 사라졌다. 

 

▲ 지장사 입구(1980년대 말경). 임진왜란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장사의 유래와 상관없이 후대에 세운 지장사이다. 지장절 혹은 지장골 불리는 이곳부터 점촌까지가 신시가지 범위라고 보면 된다.
▲ 옹기를 구워 팔던 점店이 있다 해서 점촌으로 불리던 일대가 단독주택 위주로 개발되었으나 아직은 허허벌판이다. 멀리 건물이 보이는 쪽이 경부선 철도 방향이다(1987년).
▲ 송탄시청 앞 신시가지의 북쪽 끝 지점. 붉은 지붕은 주둔 미군에게 제공한 외인 연립주택이다. 오른쪽에 재건축으로 사라진 주공2단지가 보이는데 그 뒤편에 지장사가 있었다. 외인 연립은 현재 아파트로 재건축 중이다(1994년).

■ 문예회관의 등장과 반쯤

▲ 이충택지개발지(1990년대 중반 경). 사진 왼쪽으로 송탄여성회관(당시 명칭)이 들어섰고 촬영하던 자리에는 송탄보건소를 지었다.

실현된 기대 

송탄시 시절이던 1990년에 시청사 옆으로 문예회관이 들어섰고, 1991년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반대편 옆으로는 송탄시의회 건물을 지었다.

문예회관의 등장으로 송탄지역 예술계에 변화를 불러오리라는 예상은 반만 맞았다. 시청이 아직 변두리였기 때문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야 했는데 주택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이 1990년대 중반 지산지구와 이충지구 개발 이후였다. 따라서 지역 예술계가 그토록 목말라 하던 발표 공간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든 공연이든 관객은 첫날 반짝할 뿐이었다. 전시는 특히 더했다. 그동안 다방을 빌려 회원전이나 개인전을 하던 것이 정식 전시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죽하면 문예회관을 두고 터미널의 잠시 빈 상가를 빌려 사진전을 했을까. 30년이 흘러 아파트로 빙 둘러싸인 문예회관이건만 아직 텅 빈 전시장은 여전하다. 

1997년에 송탄시청 앞으로 형성된 상가 일대가 관광특구로 지정받았다. 미군부대 정문 앞 신장쇼핑몰을 관광특구로 지정할 때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일대까지 ‘송탄관광특구 서정지구’로 함께 지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도 이곳이 왜 관광특구로 지정받았는지 어떤 관광자원이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이 관광특구라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지도 의문인 곳이다. 관광특구와는 별개로 아주 독특한 지구임이 분명하다. 시청 앞으로 곧고 넓게 뻗은 도로 양옆에 형성된 상가 대부분이 대로변은 물론이고 이면도로의 골목까지 요식업소가 밀집한 거리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일대가 아주 오래된 건물이나 옛 도시였다면 독특한 관광지로 더 주목받았을 것만 같다. 

며칠 전 이곳 송탄출장소 앞 대로에서 관광축제를 열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중단 3년 만에 다시 연 것이다. 옛 생각이 났다. 평택시 주무과장이 소개해서 왔다며 5월 5일부터 벚꽃축제라는 이름으로 국도변 녹지 일대에서 개최하려는 기획안을 갖고 온 것이다. 벚꽃은 3월 말 4월 초에 핀다는 점과 축제는 지역 상가 활성화가 더 큰 목적일 테니 송탄시청 앞 대로에서 버스를 우회시키고 실행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평택시 재정 후원으로 치르는 공식 행사이기에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무과장이 왜 내게 그 실무책임자를 보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시작한 축제가 계속되고 있다. 지금 다시 그런 자문을 요청받는다면 뭐라고 말해줄까. ‘축제는 살아있는 생물입니다’ 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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