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을 놀부로 보는 사고방식은
아주 낡아빠진 도덕주의 사관의
저급한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 백승종
역사학자

사람들은 필자에게 묻는다. “아니, 늘그막에 왜 하필 원균입니까? 그 사람 평판이 나빠요. 이순신 지지자가 세상에 즐비한데요. 그뿐인가요. 자료를 보셔서 알겠지만요, 원균에 불리한 사료史料가 대부분이지요. 아무리 글을 잘 써도 테러당해요. 원균에서 손 떼고요, 16세기 조선을 알아보기를 원하신다면 제발 이순신을 쓰세요!”

감사한 충고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원균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일관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필자는 역사적 신화를 파괴하기 위해서 역사를 공부한다. 신화의 파괴야말로 진실을 재발견하는 나름의 연구 방법이다. 1980년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 40년 넘게 한 일이 대부분 그런 일이었다.

사람들이 그저 미신이라고 여기며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은 예언서 <정감록>을 필자는 당당한 역사적 사료로 취급했다. 정치적 예언서의 유행은 한낱 미신의 유행에 그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거기에서 성리학을 대체할 ‘대항이데올로기’가 싹텄다고 보았다.

또, 모두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른바 개혁 군주 정조가 얼마나 보수적인 정치가였는지를 밝혔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무력하였던 천재 시인 강이천과 정조를 가상의 대결로 몰고 갔다. 신화를 벗기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필자가 역사 공부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동학’에 있었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주제가 모두 동학과 관련이 있다. 그런 점에서 동학의 성취를 이야기할 때도 농민 전쟁 또는 무력 투쟁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평민지식인이 주도한 ‘관계의 질적 전환’이란 것에 동학운동의 참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조선은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성리학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럼 누가 성리학적 문명화의 견인차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필자는 그런 문제의식으로 세종을 바라보았다. 다들 세종을 일컬어 훌륭하다, 진정한 성군이다, 그런 식으로 찬미한다. 필자는 아니다. 공부해 보니까, 그 세종이란 임금이야말로 조선을 완전히 성리학 일색의 사회로 만든 주동자였다. 세종은 물론 대단한 왕이었으나 인간적으로 보면 결함도 적지 않았고, 그가 원한 세상을 후세가 만들고 보니 그다지 좋은 세상도 아니더란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싫어하겠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영락없이 그러했다.

그 사이에 6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지금 필자를 움직이는 하나의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 프레임’의 파괴이다. 세상 사람은 원균을 놀부처럼 여긴다. 그들은 이순신을 흥부로 보고, 원균을 욕한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아주 낡아빠진 도덕주의 사관의 저급한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이제 죽을 때까지 도덕주의 사관을 비판하려고 한다. 이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한국의 정치판을 그런 싸구려 도덕주의로 재단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가. 필자는 전력을 다해서 놀부 프레임에 갇힌 원균 장군을 구하려고 한다. 반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갈 데까지 가보려고 한다. 여러분의 응원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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