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스무 살에 처음으로 맞은 대학생활의 여름 방학은 유난히도 길고 도 더웠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보충수업과 늦은 저녁까지의 자율학습이 당연했던 여름방학은 대학생이 되자 4절지 스케치북의 공백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갑자기 갖게 된 어색한 시간의 공백에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감도 못 잡은 채로 그렇게 하루하루가 빠르고 허무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십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 ‘넌 스무살 그 때에 뭘 했어?’ 라고 물어본다면,
세 가지는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 그만큼 인상 깊은 일이었으니까.
첫 번째는 정말 친한 친구들과 함께 처음으로 가본 부산 여행.
두 번째는 뜨거웠던 월드컵의 열기,
세 번째는 밤낮이 뒤바뀌어서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잠을 못 들어 괴로워 할 때 누나가 추천해줘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이 한 권의 책이다.

그 날 역시 새벽까지 잠이 안와서 집안을 어슬렁거리자 누나가 책 한 권을 던져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심심하면 이 책 한번 읽어봐. 한 시간이면 다 읽을 걸? 봐, 책도 작고 얇잖아. 그리고 처음에 몇 장 보기 시작하면 끝까지 보게 될 꺼야”
“무슨 내용인데? 재밌어? 장르가 뭐야?”
“내용만 더 얘기하면 재미없으니까 일단 그냥 읽어봐”
아멜리 노통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프랑스 작가,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 강렬한 붉은 표지에 하얀 글씨로 적혀져 있는 제목. ‘적의 화장법’
왠지 그 제목과 부담스럽지 않은 책의 두께가 마음에 들었다.
(굳이 이렇게 자세하게 책의 외형을 언급하는 이유는 십년이 지난 지금도 표지 하나 안바뀌고 온오프라인에서 그대로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전에도 누나가 추천해줬던 책들은 대부분 재밌게 읽었던 터라 책을 가지고 방에 돌아와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나 말대로 짧은 시간 내로 다 읽었고, 긴 여운은 그 후로 계속되었다. 그 때 이 소설에서 느꼈던 신선한 충격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누군가가 ‘뭐 추천해줄 만한 재미있는 책 없어??’라고 물어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책 중의 한 권이다.

한 남자가 공항에서 자신의 비행기가 출발하길 기다리고 있다. 비행기 이륙이 늦어진다는 방송을 듣고 짜증나기 시작하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시하고 싶지만, 계속 자신만을 상대로 말을 거는 이 남자..
말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아서 자리를 피하지만, 따라오면서 자꾸 귀찮게 말을 걸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강렬한 엔딩까지 둘의 대화로만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표지만큼이나 인상적인 내용이 여러분들의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내용만 더 얘기하면 재미없으니까 일단 일어보시길!!”

-이봐요, 제롬 앙귀스트, 내가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주리다. 나를 입 다물게 하는 합법적인 방법은 딱 하나요. 즉, 말을 하는 거요. 그걸 명심하세요. 그나마 그래야 당신이 빠져나갈 수가 있을겁니다.
-책 내용 중에


 



박원진
평택시립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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