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평택농악 김용래 보유자 농악인생 70년 기념
고사굿·헌정공연·지운하 남기문 명인공연·사인회 등 진행


 

 

국가무형문화재 평택농악 보유자 김용래 선생의 농악인생 70년을 기리기 위한 평전 <사미에서 밑동까지> 발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11월 12일 오후 1시 팽성읍 평궁리 평택농악전수교육관 앞마당에서 개최됐다.

이날 행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무형문화재 평택농악의 유일한 보유자 김용래 선생의 농악인생 70년과 보유자 지정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진행한 ‘김용래 평전’ 출판 기념행사로 진행됐다.

이날 출판기념행사는 사회자의 개막식을 시작으로 ▲김용래 선생 인사말 ▲김용래 평전 <사미에서 밑동까지> 저자 박성복 평택학연구소장의 김용래 농악인생 70년 액자 증정 ▲김용래 평택농악 보유자와 조한숙 보존회장의 고사굿 합동공연 ▲평택농악 헌정공연 ▲지운하·남기문 명인 합동공연 ▲국가무형문화재 농악 보존단체 회장들의 축하영상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구미무을농악 축하공연 ▲김용래 보유자 인터뷰와 사인회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김용래 평택농악 보유자는 1939년 6월 6일 충청남도 천안군 화성면 쌍용동 299번지에서 아버지 김남준과 어머니 김금순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 살의 나이에 난장패를 만나 열세 살에 사미로 난장패에 발을 들여놓았다. 열네 살에 공도소방서 걸립에 나섰으며, 열여섯 살에 평택농악 명인 최은창을 만나 경기도와 충청지역을 순회하며 본격적으로 걸립패 활동을 이어갔다.

열일곱 살부터 남사당에 참여해 이승만 대통령 특명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했다. 열여덟 살에는 서울 씨름난장에서 송순갑을 만나 대전농악단에서 본격적으로 상모를 썼으며, 열아홉 살에는 법고 명인 이돌천에게 웃다리 상모를 사사했다. 스물한 살부터 3년간 부산에서 약장사를 따라다니며 악사로 활동했고, 이후 백제문화제에 참여했지만 조시점 여사와 결혼 후에는 상모를 불태우고 농악판을 떠났다. 한동안 농사에 전념했으나 풍물소리 환청이 들리는 원인 모를 병을 앓게 되면서 다시 농악판에 뛰어들었다. 

스물여섯 살에는 이돌천 명인과 함께 다시 농악판에 섰으며, 스물여덟 살에는 인천 대성농악단에서 활동했고, 서른한 살에 남사당 일원으로 최은창, 이돌천 명인과 함께 활동했다. 한국민속촌 농악단에도 잠시 몸담았으며, 마흔한 살에는 남사당의 요청으로 일본 세계인형극총연합회 순회공연에 참여했다.

1980년 제주도에서 열린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후 평택농악에 합류해 1987년 마흔아홉 살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 전수교육조교로 지정받았다. 20년이 지난 2000년 8월 22일 평택농악 최고봉인 보유자로 지정받고 2001년 평택농악보존회장에 취임해 18년간 수장으로서 보존회를 이끌었다.

김용래 보유자는 평택농악보존회장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무형문화재축제와 평택농악 상임단원 제도 시행, 예운관 준공, 평택농악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웃다리농악 최고 명인으로 사미~무동~밑동, 상법고를 두루 거치며 한평생 농악판을 누볐던 경험과 당대 최고로 평가 받았던 예능을 바탕으로 평택농악의 올곧은 전승과 후계 양성을 위해 매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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