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도 식후경

어릴 때 학교 구내에 있던 이발소 주인이 민물고기를 먹고 치료약도 구할 수 없는 디스토마에 걸려 죽지도 않고 골골하며 온갖 것을 다 먹어도 백약이 무효인데 그렇다고 딱히 당장 목숨이 끊어질 병 또한 아닌지라 매일 황달 걸린 사람처럼 얼굴은 노랑 탱탱하고 바싹 마른 몸으로 기운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며 지내는 것을 본 것이 어찌나 머릿속 깊이 박혔든지 앞으로 민물고기는 절대 먹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맹세를 한 끝에 민물고기 낚시에는 관심조차 갖질 않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낚시를 두려워하게 된 것은 낙동강 하류에 방목을 하는 소떼들 가운데 70%가 디스토마에 감염이 되었다는 뉴스를 듣고는 디스토마 균을 가지고 있는 물고기가 스치고 다니는 풀만 먹어도 디스토마가 걸린다고 하니 더욱 더 낚시 공포증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1970년대 후반 어느 날 안성에서 살던 친구가 이웃으로 오면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낚시를 즐기는 친구와 벗하면서 낚시에 한두 번 따라다니게 되고 그러다 보니 낚시에 맛이 들어 낚싯대까지 장만해서 저수지를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평택에는 낚시를 할 만한 저수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근 안성군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친구는 고향이 안성이었기에 안성 낚시터는 어느 계절 어느 자리에 가면 명당이라는 ‘포인트’ 정보까지 훤히 꿰고 있었습니다.
특히 여름방학이 되면 일부러 월요일까지 기다렸다가 아침 일찍 낚시터를 찾았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월척을 하겠다는 욕심에 금요일 밤부터 낚시터엘 찾아와서 낚싯대를 펴고 밤낚시부터 시작을 해서는 토요일 종일 그리고 일요일 오전까지 월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면서 포대자루로 가지고 온 깻묵을 산지사방 뿌려놓았으니 정작 본인의 낚시는 별 볼 일이 없이 끝이 났겠지만 북적대던 낚시꾼들이 모두 일터로 돌아간 월요일 아침 적막한 낚시터는 그 밑밥 덕분에 어느 곳에 낚싯대를 펴고 앉든 숨쉴 새도 없이 준척짜리 붕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입어료 500원을 내고는 고기를 잡다가 잡다가 나중에는 팔이 아파 낚시를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바쁜지 낚시터 관리인이 배를 타고 날라다주는 점심밥도 먹을 시간이 없어 결국 낚싯대를 꺼내놓고는 밥을 먹곤 했습니다. 낚싯대를 그냥 걸어놓고 밥을 먹다가는 밥을 먹는 사이에 물고기가 낚싯대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었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힘들게 잡은 물고기도 잡는 것만으로 끝이었습니다. 웬만한 ‘잔치랭이’ 들은 도로 저수지에다가 다 풀어놓고 나머지 씨알이 굵은 것들을 가지고 와서는 물고기를 좋아하는 이웃사람들에게 다 나눠주었습니다. 물속에서 미동도 않는 ‘찌’를 바라보고 앉아 있노라면 세상만사 모든 시름이 다 잊혀졌습니다.
금광저수지, 마둔저수지, 쌍용, 청용저수지, 칠곡저수지, 반제저수지, 고삼, 만수터 저수지,명성저수지… 그리고 내리, 안성천 뚝방… 낚시하러 가야할 곳은 많고 많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밤낚시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낚시꾼과 노름패는 죽으면 무르팍부터 썩는다’는 시쳇말처럼 밤낚시는 괴롭고 힘들지만 훤히 동이 트는 새벽 무렵 저수지 가득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밤을 새운 낚시꾼들에게 지난 밤 고통에 보상이라도 하듯  선경仙景으로 데려다줍니다. 졸리는 눈을 비비며 잠시 정신 줄을 놓고 무아지경에 빠져 물안개를 바라다보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환상에 빠집니다.
프로야구와 골프가 대중화 되기 전 주말 취미로 낚시가 한창 인기있는 스포츠 노릇을 하던 시절 낚시광들은 토요일이면 아예 낚시가방을 들고 출근했습니다. 월척에 미친 낚시광들에게 가족의 행복은 뒷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주말 과부’라는 말이 성행했습니다. 여자들은 집에서 아이들이나 봐야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낚시터에는 여성 조사들이나 가족단위 낚시족들이 늘어났습니다.
평택에는 낚시터가 없었지만 수많은 낚시꾼들은 일단 평택을 거쳐서 낚시터로 갔다가 다시 평택으로 와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모두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교통수단인 기차역이 평택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01년 경부선 철로공사 초기 애당초 설계도에는 안성 땅으로 지나가게 되어있던 철도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안성 유림儒林에서는 마을 앞으로 기차가 지나가면 지세가 약해져 동네가 망한다며 결사반대를 했고 그 덕에 기찻길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고 너그러운 평택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 기차 덕분에 낚시꾼들이 들려간 평택의 음식점들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입에 입을 거치고 거쳐 평택은 어디 붙어있는지 몰라도 평택 ‘파주옥’ 곰탕이나 ‘고박사’ 냉면은 조선팔도 어디를 가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입소문이 모두 낚시꾼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식가들은 '고박사' 냉면을 먹으러 가기위해 낚시꾼들과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관광지로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평택,
혹여 기지촌으로 오해를 받을 소지가 충분한 평택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분명 평택의 맛을 전하는 많고 많은 평택의 음식점들이라고 믿습니다. 교통과 통신 그리고 기찻길이야말로 현대사회를 살리는 핏줄이요 생명선인 것이지요.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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