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실천한 경주이씨(평택 진위) 가문 정신 기억해야

 

▲ 중국 길림성 추가가 신흥강습소 터, 지금은 옹기공장으로 남아 있다


한국사회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1970~80년대 급격한 개발로 인한 성장통을 겪어오면서 과거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기회를 갖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특히 국가 차원에서는 성찰의 기회를 갖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있지만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이 같은 움직임이 요원한 상태다. 평택은 내년이면 이 땅에 평택사람들이 살아온 이후 처음으로 지금의 평택과 같은 행정구역의 모습을 갖춘 지 100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가 된다.
<평택시사신문>은 ‘행정구역 통합 평택 100주년’을 맞아 ‘평택사람의 흔적 찾기’ 일환으로 지난 8월 8일부터 11일까지 4일간 학계와 향토사학자가 함께 ‘중국 속에서 평택 흔적 찾기’를 진행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이주한 길림성 평택툰 ▲진위면 가곡리 경주이씨 종토(宗土)를 팔아 세운 신흥무관학교 ▲삼학사 중 평택출신 홍익한 오달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심양(瀋陽)과 그 곳에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평택사람들의 이야기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 이세필 신도비 앞의 이시영 부통령 등 경주 이 씨 후손들(1952년)

 

▲ 중국 길림성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상징 경주이씨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이 말은 프랑스어로 ‘높은 신분에 따르는 정신적 또는 도덕적 의무’로 해석된다. 이 말의 연원은 ‘혜택 받은 자들의 책임’ 또는 ‘특권 계층의 솔선수범’이란 뜻으로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상의 의무 실천에 대해 로마 귀족이 가졌던 기본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서구 사회의 귀족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으로 전승된 것으로 주로 서양의 전유물처럼 느껴진 것도 사실이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산되어 정치인·고위 공직자·사회를 이끌고 있는 각계 지도자들이 자원 봉사·기부 등을 통해 활발히 행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공헌의 상징어로 인식된 ‘노블리스 오블리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주최씨’이다. 흔히 ‘최부잣집’으로 널리 알려진 경주최씨는 전통적으로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하였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고 한다.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했으며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지 않도록 했다.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을 입게 하였고 100리 안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했다. 바로 최부잣집의 전통이었으며, 가진 자의 실천적 삶이었다. 최부잣집은 일제강점기 독립자금을 지원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와 같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또 다른 상징이 평택 진위의 경주이씨였다. 진위 경주이씨는 한말과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노블리스 오블리주’ 가문이며 그 상징이 신흥무관학교이다.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는 바로 진위 경주이씨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진위에 자리 잡은 경주이씨는 이항복의 후손으로 이세필 대에 진위면 봉남리 아곡마을에 터를 잡고 세거했다. 이세필-이태좌-이종성-이유승으로 이어지는 가계는 이유승 대에 이르러 이석영·이시영·이회영 등 6형제를 뒀다. 한편 이세필-이정좌-이종주-이경관-이석규-이계조-이유원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가계가 있었다. 이유원은 정승에 있으면서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유원에게는 아들이 일찍 죽어 후손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유원은 이유승의 둘째 아들 이석영을 양자로 입적시키고 진위 일대의 땅을 물려줬다. 훗날 이석영은 동생 이회영의 뜻을 따라 진위 일대의 땅을 팔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지원했다.

 

 

 

▲ 이석영·이화영 6 형제의 회의 모습(국가보훈처 자료 인용)

최초의 사관학교, 독립군 양성 토대 마련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는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 이른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한편에서는 의병운동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 국권을 지키고자 했다. 이러한 시기에 다양한 국권회복운동 단체들이 결성됐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신민회(新民會)였다. 신민회는 겉으로는 국권회복운동 단체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장독립투쟁을 추구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이었다. 이 신민회의 주도적 인물이 경주이씨 가문의 이회영이었다. 이회영 등은 일본에 강점당하기 전인 1910년 3월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현지답사를 했다. 이때 안창호와 이갑은 미주지역·이동녕은 러시아 연해주지역·이동휘는 북간도·이회영은 서간도·조성환은 북경지역을 각각 살펴봤다. 그 결과 이회영이 답사한 서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 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강점한 일본은 국내 독립운동 지사를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총독암살사건’이라는 것을 조작해 신민회 주요 인사를 검거했다. 이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이회영 일가는 서간도로 망명을 결정했다. 1910년 12월 어느 날 가솔(家率) 40여 명과 함께 서울을 출발한 이회영 일가는 13시간 만에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몇 시간 머물다 새벽 3시경 썰매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압록강은 국경지대로 일본의 감시가 삼엄해 건너기가 쉽지 않았지만 중국 노동자로 위장하고 야밤을 틈타 두 시간 만에 현재의 단동인 서간도 안동에 도착했다. 안동에서 다시 마차 10여 대로 나눠 5백리나 떨어진 횡도천을 8일 만에 도착했다. “갈수록 첩첩 산중에 만학천봉은 하늘에 닿을 것 같고, 기암괴석 봉봉의 칼날 같은 사이에 쌓이고 쌓인 백설은 은세계를 이루었다. 험준한 준령이 아니면 갇판 얼음이 바위같이 깔인 곳을 마차가 어찌나 기차같이 빠른지 채찍을 치면 더욱 화살같이 달렸다” 이는 당시 횡도천까지 가는 과정을 남긴 기록이다. 이곳에서 다시 통화를 거쳐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했다. 삼원포는 유하현 강가점 경기툰 평택마을과는 두 시간 거리다.
망명하기 전 이회영 일가 여섯 형제는 집안의 노비를 모두 해방시켜줬으며 가산을 정리했다.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돈이 약 40만원이었는데, 지금의 가치로 600억 원이 넘는 거금이었다. 특히 둘째 이석영은 자신이 물려받은 진위 일대의 땅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이를 기반으로 이회영 일가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에 정착하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이후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으며 합니하, 고산자 등으로 이전했다가 1920년 8월 일본에 의해 폐교됐다.

 

 

▲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경주 이 씨 이세필 묘소(진위면 봉남리)

 

 

▲ 이석영 사망 관련 신문 보도(동아일보, 1934년 2월 28일자)
이석영, 진위 소유 땅 처분 신흥무관학교 설립
평택 진위 일대 경주이씨의 재산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청년들의 군사교육을 위한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는 1911년 4월 추가가 대고산 아래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듬해 1912년 5월 이회영 일가가 삼원포에서 조금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로 주거지를 옮김에 따라 신흥강습소도 함께 이전하고 신교사를 신축했다. 당시 대고산 아래 설립됐던 신흥강습소의 모습은 현재 전혀 남아있지 않고 옹기공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통화현 합니하에 있던 신흥강습소는 1919년 4월 다시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고 신흥무관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 터 역시 현재 그 모습은 남아있지 않고 옥수수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고산자는 경기툰 평택마을과는 30분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다. 경기툰 평택마을 사람들도 고산자의 이석영 일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을 것으로 본다.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교육사업을 하던 이석영 등 이회영 일가의 헌신적인 모습과 군사훈련을 받던 학생들의 함성이 뇌리에 강하게 떠올랐다.

 

 

 

▲ 중국 길림성 신흥무관학교 위치도
그렇다면 이석영은 어떤 인물인가? 그동안 이회영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석영은 이회영의 둘째 형으로 이유원의 양손으로 입적해 진위 일대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1855년 서울 저동에서 태어난 이석영은 1885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승지까지 지냈으나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 관계를 은퇴했다. 1910년 12월 가산을 전부 매각해 모든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해 유하현 추가가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이동녕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1917년까지 육영사업에 진력했다. 그러나 육영사업에 성공하지 못한 이석영은 1928년 상해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934년 2월 16일 상해 아우배로(亞雨培路) 서가고우(徐家庫寓)에서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 땅을 떠난 후 3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북만주와 북경 상해 등지로 유랑하며 파란중첩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모진 병마에 걸리어 작년 겨울 이래 신음하던 바 드디어 그와 같이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시에는 동씨의 아우인 이시영 씨도 딱한 사정으로 항주(杭州)에 있게 되어 만나보지 못하고 쓸쓸히 영면하였다”라고 그의 죽음을 알렸다. 이석영은 2월 20일 장례식을 치루고 상해 홍교로(虹橋路)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이에 비해 <조선중앙일보>는 유하현 합니하로 이주 자택에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6~7년 조선 청년 교육사업에 헌신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일본 측 정보문서에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한편, 이세필 묘소를 비롯한 진위면 경주 이 씨 묘역은 후손인 봉남3리 이철우 이장이 중심이 돼 관리를 하고 있다.
평택 밖의 평택을 찾는 일은 그리 쉽지는 않다. 평택의 땅을 처분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석영의 삶은 그가 비록 평택에서는 살지 않았지만 평택인으로서의 참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진위에 자리 잡은 경주이씨 가문은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대표적 사례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여한 그들의 정신을 역사 속에 교훈으로 기리 남을 것이다.

 

 

 

■ 중국 기획취재 공동취재단
  성주현/청암대학교 연구교수
  박성복/평택시사신문 부사장
  황수근/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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