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 다르다

1980년, 김장철이 지나고 겨울방학이 가까워 온 어느 날 평택성동초등학교 6학년 교실.
옆자리에 앉은 무남이가 자기 집에 가면 식혜가 한 독 가득 있다고 했습니다.
- 엉! 식혜가 한 독씩이나!!!
놀라운 일입니다. 명절이나 되어야 어쩌다가 한 사발 먹을 수 있는 식혜, 단술이 한 독씩이나 있다니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서 학교 공부가 파하기를 기다렸다가 바람같이 달려서 비전동 충혼산 아래에 있는 무남이네 집엘 갔습니다. 그러고는 신발도 팽개치듯 벗고 마루에 놓인 장독 항아리 뚜껑을 열었습니다.
-우엥! 야! 무남아 이 게 무슨 식혜야!? 이게 뭐야? 도대체 무슨 냄새가 이렇게 고약해, 이것도 사람이 먹는 거야!?!
-왜 그래!? 그 거 식혜 맞아 우리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고 또 우리 식구가 겨우내 먹을 거라서 많이 담근 거라구.
무남이네 장독 속에 담긴 것은 쌀알이 동동 뜨는 달디 단 단술이 아니라 이북 땅 함경도 사람들의 겨울 양식인 가자미 식혜였습니다. 이북 남자들은 남쪽 남자들과 달리 대체로 집안일을 잘 합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집안 청소를 하고 걸레도 빱니다. 그리고 부엌에 들어가 음식 만드는 일도 서투르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북사람들 풍습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어릴 때 중국집에 짜장면을 먹으러 가면 여자들은 난롯가에 둘러앉아 뜨개질을 하는 동안 남자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식탁까지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음식이 다 차려지면 여자들은 그 때서야 젓가락을 들고 먹기만 하면 됩니다. 뒷설거지도 모두 남자들 몫입니다.
하지만 남쪽 사람들은 ‘양반’이라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질색하며 상스럽게 여겼습니다. 남녘에서는 어릴 적부터 남자아이들이 부엌근처를 얼씬거리면 ‘부랄’이 떨어진다며 경고를 합니다.
함경도 사람들이 시장엘 다녀오다가 길에서 만났습니다.
-도투 물을 잘 먹습데? 아이 먹습데?
-잘 먹습데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돼지가 밥을 잘 먹디 안 먹디?
-잘 먹지
우리 고어古語에서도 돼지는 ‘돝’이라고 불렀습니다. 함경도 사람들은 시장에 가서 가오리를 사면 머리 부분에 구멍을 내서는 새끼줄로 엮어 집까지 끌고 옵니다. 그러면 걸어오는 동안에 질기디 질긴 가오리 껍질은 다 벗겨져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씻어서 먹었습니다. 체면치례를 중시하는 남쪽사람들 풍습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함경도 사람들이 가장 즐겨먹는 반찬 가운데 하나가 마른 멸치를 날 고추장에 찍어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밥상 위에 밥 한 그릇과 마른 멸치만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함경도 사람들은 아침을 먹고 나서도 밥상을 치우지 않고 방 윗목에다 그냥 밀어놓습니다. 그리고는 학교에 갔다 온 아이들은 오는 순서대로 아침에 먹던 밥상을 다시 아랫목으로 끌어내려 밥을 먹고는 다시 윗목으로 밀어둡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오는 아이도 똑같은 방법으로 밥을 먹습니다.
추운 날씨와 물 부족 그리고 난방을 고려해서 만든 부엌과 방 사이에 따로 벽을 만들지 않는 독특한 주택 구조를 가진 주거환경이 가능한 한 활동을 적게 하는 생활방식으로 변화시킨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 아버님은 양변기에 소변을 한두 번 보고는 절대 물을 내리지 않으세요.
그래서 변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때는 정말 구역질이 다 난다니까요!
6·25 때 삼팔선을 넘어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와 평택 통복시장 안에서 약국으로 자리를 잡아 5일마다 서는 장날이면 각처에서 온 장꾼들이 약을 사러 구름같이 모여들며 큰돈을 벌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 집안 이야기입니다.
시부모님 두 분이 모두 이북사람인 집에 시집을 와서 이북 사람들의 생활습관이 몸에 익지 않아 애를 먹은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이북사람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적으로 이북 사람들은 물건을 아껴 쓰고 절약하는 생활이 오랫동안 몸에 배서 아예 유전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휴지 한 장도 허투루 쓰지 않고 제일 먼저 입을 닦은 다음 놓아두었다가 상을 닦고 그리고도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나중에 방바닥을 닦고서야 휴지통에 넣습니다.
최 선생은 6·25 때 동생과 함께 피난 가는 사람들 구경을 나왔다가 피난민 대열에 휩쓸려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남한으로 내려와 군에 입대해서 장교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제대를 하고 시험을 봐서 교사가 된 뒤 평택으로 내려왔습니다.
태생이 부지런한 송 선생은 아침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과수원을 일구며 일을 하다가 아침을 먹고 학교에 출근했습니다. 퇴근을 하고도 집에 돌아와서는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일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최 선생은 혼자 1만평이나 되는 배 과수원을 만들어냈습니다.
-여보! 이젠 우리도 이만큼 자리를 잡았으니 올 가을에는 함께 제주도로 여행이라도 다녀옵시다.
그런 말을 나눈 지 얼마가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훤히 동이 텄음에도 바깥에서 아무 기척이 없자 최 선생 부인은 순간 불안한 마음에 밖으로 나가 최 선생이 자고 있는 창고 방을 들여다보았습니다.
-...
최 선생은 자는 듯이 숨져있었습니다.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와 가족과 고향을 그리며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피난민 1세대는 이제 몇 분 남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은 언제나 이루어질까요?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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