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잇는 잽이들 한 무대에 서다

지영희 선생이 주도한 대한민국 국악관현악단, 
창립 50주년 기념연주회 ‘민족음악의 선율’

 
평택이 낳은 우리나라 민족음악의 거장 지영희 선생을 추모하는 무대가 10월 4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관에서 펼쳐져 많은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대한민국 국악관현악단 창립 50주년 기념연주회 ‘대를 잇는 잽이들’은 평택시와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가 주최하고 지영희기념사업회가 주관한 행사로 전통과 현대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며 민족음악의 자리매김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온 지영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됐다.
지영희 선생은 우리민족음악의 큰 틀을 세우고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학생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함과 아울러 국가기관으로서는 최초로 세운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초대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이번 연주회 ‘대를 잇는 잽이들’에서는 중앙대학교 김성녀 교수와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정회천 교장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특히 이번 연주회는 다른 연주회와는 달리 8명의 지휘자가 한 무대에서 지휘를 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지영희국악관현악단의 연주와 함께 진행된 이번 무대는 지영희 선생의 제자인 동국대학교 박상진 교수·전남대학교 김광복 교수·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송선원 국악교육연구센터장·중앙대학교 최상화 예술대학장·동국대학교 한상일 교수·중앙대학교 김재영 교수와 지영희 예술세계의 영향을 받은 전북대학교 이화동 교수·국립창극단 이용탁 음악감독·안산시립국악단 임상규 상임지휘자 등이 지휘를 맡아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주옥같은 수많은 곡들을 연주했다.
또한 국악인 김영임 씨의 민요와 서울대학교 임재원 교수의 대금연주·용인대학교 박두리나 교수의 해금연주가 협연돼 한층 깊은 국악의 풍미를 더했으며 평택 출신의 청년국악인들로 구성된 타악그룹 ‘진명’의 혼신을 다한 사물놀이 협주는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연주회는 1964년 지영희 선생이 작곡한 관현악곡 ‘만춘곡’ 연주를 시작으로 ▲대금협주곡 ‘대바람소리(1978)’ ▲해금협주곡 ‘공수받이(1989)’ ▲관현악곡 ‘남도아리랑(1994)’ ▲피리협주곡 ‘창부타령(1990)’ ▲관현악곡 ‘춤을 위한 갠지갱(2001)’ ▲경기민요협주곡 ‘한(1996)’ ▲사물놀이 협주곡 ‘신모듬(1986)’ 등이 이어졌다.
특히 지영희 선생이 1939년 작곡한 만춘곡은 대한민국 최초로 무용을 위해 작곡된 창작 국악곡으로 소규모 편성 형태의 합주곡이다. 독특한 해금가락을 주선율로 구성해 빠르고 경쾌한 곡이며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학교) 내 학생국악관현악단 창단 이후 재구성돼서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국악 창작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대에 민속음악 선율을 소재로 만든 초기의 국악관현악곡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연주회 마지막 순서로는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합창단과 서울국악유치원 원생들이 국악의 노래 ‘예사’를 합창하며 행사를 마쳤다.
한국음악연구소 노동은 소장은 “지영희 선생은 근대성이라는 횃불을 밝혀나가는 역사적인 용기와 합리적인 추구로 국악관현악을 추구했으며 작품창작과 음악표현은 우리의 직관성으로 조화를 이뤄나갔다는 점에서 위대한 음악가”라며 “당시 지영희 선생이 들었던 횃불을 함께 맞잡았던 국악예술학교 교사진과 작곡위원·국악기개량연구회·제자들 모두 위대했다”고 평가했다.
 

■ 국악 현대화의 선각자 지영희, 그는 누구인가?

지영희의 한국음악 예술혼,
평택에서 태어나 온 누리에 꽃피워~

지영희, 국악기 연주·교육·지휘·영화음악·악기개량·국악 현대화의 선각자
1964년 우리나라 최초 국악관현악단 창립, 상임지휘자로 한국음악 육성

한국음악의 진화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무속음악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과거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며 생활했던 선조들은 자연재해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풍농과 풍어·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 흥했고 그 수단으로 무속음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평택은 특히 바닷가에 접해있었고 농업과 어업이 발달해 항상 축원과 기원이 필요했으며 이 때문에 무속음악인 굿음악이 발달했다. 이 같은 지리적 여건으로 평택에는 지영희 가문의 ‘지문일가(池門一家)와 방용현 가문의 ’방문일가(方門一家) 같은 경기도당굿의 대가들이 터를 잡고 굿음악을 이어올 수 있었다. 때문에 평택은 西에는 ‘지문일가’, 東에는 ‘방문일가’로 경기도당굿의 주류를 이뤄왔다.

 
세습무 가문에서 태어난 지영희
지문일가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지영희는 1909년 평택시 포승읍 내기리에서 지용득과 김기덕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포승은 바다와 접해 무속신앙이 발달한 마을로 지금도 무속을 섬기는 만신들이 마을 곳곳에 있다.
지영희 일가는 이 일대에서 무업(巫業)으로 생계를 이었다. 지문일가의 세습무(世襲巫) 전통은 할머니 전석준에서 어머니 김기덕·작은어머니와 여동생 지옥희로 이어졌다. 지영희의 스승이었던 지용구와 음악적 스승이자 동지였던 지갑성·경기민요 명창 지연화도 지문일가의 명인들이다.
지영희는 11세에 만호리로 이주한 뒤 경기도당굿의 명인들로부터 다양한 기예를 익혔다. 11세에 이석은에게 승무·검무·굿거리를 배웠고 22세에는 조항련에게 호적을, 23세에는 정태신에게 양금을 배웠다. 이어 24세에는 지용구에게 해금을 배웠고, 양경원에게는 피리를 배웠다. 이후 김계선에게 풍류대금을, 방용현에게 민간풍류대금을, 최군선에게는 농악을, 오덕환에게 무용장고 12채를, 박춘재에게 경기서도민요를 배우는 등 다방면에 능해 지금으로 치자면 만능 엔터테이너처럼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자자했다.
1937년 서울로 상경해 한성준의 조선음악연구소에 들어간 지영희는 한성준과 최승희 무용단의 악사로 민속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국악의 위기극복을 함께 고민했다. 한성준과 함께 일본에 가서 음악무용 발표공연을 하고 음반을 취입했으며 최승희무용단과 함께한 국내외 공연을 통해 우리의 민속음악과 중국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예술세계의 폭을 더욱 넓혀나갔다.

가야금산조 명인 성금연과의 만남
가야금산조의 명인 성금연과는 1945년 혼인해 당시 민속음악계에서는 “당대 최고인 두 명인의 혼사”라는 말로 부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지영희와 성금연은 음악적 동반자이자 생의 반려자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서로 ‘취장보단(取長補短)’의 삶을 살아갔다.
지영희는 당시 전통음악 대가들에게 전수 받은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바탕으로 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 교사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초대 상임지휘자로 활동 했다. 그러나 지영희의 가장 큰 업적은 스승이나 직감에 의존했던 국악을 피아노 등 서양 악기나 국악오케스트라로 연주하고 오선보에 그려져 교실에서 아이들의 입으로 불러지게 됐다는 점이다. 이 같은 지영희의 국악 현대화 활동은 민속음악과 무속음악의 채보 활동에서 시작해 작곡·교육으로 이어졌으며 관현악연주로 종결지어졌다.

 

국악관현악단의 창시자 지영희
지영희는 국악이 살아남으려면 국악기로도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다양한 서양음악도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당시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어냈다. 1947년 국극 ‘선화공주’ 공연시 12인조 악단을 꾸려 연주했고 1962년 ‘악성추모제’에서 50여 명의 국악예술학교 학생들로 관현악단을 조직해 초연(初演)을 했다. 관현악단이 처음으로 연주한 ‘청하지곡’은 지영희의 창작 관현악곡이었다. 관현악을 위해서는 넓은 음폭의 연주가 가능해야 했는데 우리 전통악기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영희는 국악예술학교 내에 악기 공방을 차려놓고 악기개량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 현재와 같이 국악 교육과 관현악 연주가 가능했던 것은 지영희가 혼신의 열정으로 만들어 낸 다양한 개량 국악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1964년 7월 25일 지영희·박헌봉·유기룡과 국악예술학교가 중심이 돼 우리나라 최초로 국악관현악단 창립 결성식을 갖고 같은 해 9월 15일 시민회관에서 역사적인 국악관현악단 창립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이때 창단 지휘는 지영희가 맡았다. 이후 지영희는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창단을 주도해 지휘자로 무대에 서는 등 우리나라 국악관현악단 창립 50년 역사의 가장 중심이 된 인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영희는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1972년 부인 성금연, 동료 김소희·김윤덕과 함께 미국 카네기홀에서 우리 전통음악만으로 구성된 공연을 펼쳐 벽안의 서양인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 등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영예를 얻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지영희는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며, 그의 아내 성금연(成錦鳶)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가 됐다.
그러나 지영희는 자신이 주축인 된 ‘한국민속예술원’과 ‘국악협회’의 갈등, 민속음악·무속음악을 없이 여기는 국악계의 풍토로 인해 국악협회로부터 제명을 당하면서 1974년 부인 성금연과 자녀들을 데리고 하와이 이민의 길을 택해 1980년 머나먼 이국땅에서 향년 72세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 부인 성금연과 함께 연주하는 지영희 선생

지영희의 예술세계 다시 움틀 곳, 평택
지영희는 한국음악의 예인(藝人)으로 연주·교육·지휘·춤·영화음악·악기개량·국악관현악단 결성·국악 현대화 등 민속음악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중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박범훈을 비롯해 최태현·김영재·최경만·김덕수·최종실·박정실·김광복·박덕근·김무경·홍옥미 등 수많은 후학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지금 국악계의 거목으로 성장해 한국음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평택시 포승읍 세습무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무속음악을 하며 굿판을 떠돌던 지영희.
자신의 음악세계를 펼쳐보지도 못하고 자칫 굿판을 맴돌 뻔한 그가 상상할 수 없는 노력 끝에 해금산조와 피리 시나위 명인으로, 한국음악 중흥의 도화선이 된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주역으로 현재와 같이 한국음악을 꽃피우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지영희만의 안목지(眼目知)가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국악 현대화의 선각자 지영희.
평택은 그의 귀소지(歸巢地)로 이제 다시 평택에서부터 지영희의 예술세계가 다시 움틀 댈 날을 기대해 본다.

박성복 기자 sbbark@korea.com


■ 김선기/평택시장

평택은 전통 예인(藝人)의 고장

 
= 오늘 연주회의 의미는
- 평택이 낳은 우리나라 민족음악의 거장 지영희 선생을 추모함과 동시에 지영희·박헌봉·유기룡 선생께서 만든 국악관현악단의 창립 50주년을 기리기 위해 평택시와 그의 후학들이 중심이 돼 준비했다. 지영희국악관현악단이 오늘 관현악 공연의 중심이 됐으며 평택출신 타악그룹 진명이 함께 참여해 더욱 의미가 깊다.

= 지영희 선생의 업적 계승
-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화신인 지영희 선생을 비롯해 평택은 모흡갑·김부억쇠·방용현 등 많은 전통 예인들을 배출한 예향의 고장이다. 특히 지영희 선생이 쌓은 전통음악의 보존 노력과 오케스트라식 국악관현악단 창립·국악교육의 현대화 등은 큰 업적으로 후손들이 잘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것이다. 평택시는 이 같은 사업 추진을 위해 예술인들과 함께 노력해 나갈 것이다.

= 한국소리터와 지영희홀은
- 평택시는 2011년 11월 평택호관광단지에 한국소리의 메카인 ‘한국소리터’를 개관하고 지영희 선생의 예술 정신을 기리기 위해 메인 홀을 ‘지영희홀’이라고 명명했다. 한국소리터와 지영희홀을 통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평택농악을 비롯해 많은 무형문화자원을 보존하고 육성해 평택시가 전통문화가 꽃피는 도시로 성장하도록 힘써나가겠다.


■ 최종실/지영희기념사업회장

지영희, 국악관현악단 창단 주도

 
= 국악 발전과 지영희의 역할은
- 협률사쭭원각사쭭조선성악연구회쭭국악원 등 근대 악단의 전통을 이으면서 동시에 악단 중심이 국악관현악단으로 전환하는 역사적 평가를 받았고, 1960년 민족예술의 창조적 계승 및 발전을 위해 설립된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는 한국음악의 근대적 전개에서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중심적 역할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 지영희 선생이 있었으며, 음악의 역사적·미학적·사회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 지영희 예술세계의 계승 노력은
- 평택시의 지원으로 ‘지영희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으며, 올해부터는 지영희 선생의 귀소지인 내기초등학교에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어 후계세대를 육성하고 있다. 매년 지영희학술대회를 개최해 지영희의 업적과 예술혼을 기리고 있으며 향후에는 지영희국악관현악단을 국내 최고의 시립 국악관현악단으로 성장시키는 일도 추진해나가겠다.

= 지영희기념사업회는
- 국악 현대화의 선각자인 지영희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이를 계승하기 위해 지영희 선생의 제자들과 학계·평택지역 인사 유족 등이 모여 결성한 단체다. 공연과 학술·추모사업 등을 전개해오고 있으며, 특히 신예 국악인의 등용문인 ‘평택지영희전국국악경연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앞으로는 지영희 선생 생가 발굴 및 보존·사료 발굴 등 다양한 선양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다. 평택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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