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육삼정의거’ 전말 담긴 일본 외무성 문서 발견

<아리요시 공사 암살 음모사건> 등 공식 문서, 원심창 의사 활약 연구 가치 매우 커
성주현 교수 올 3월 ‘상해 육삼정의거 80주년 기념행사’ 당시 의거 현장 확인

▲ ① 천진 일본영사관 폭탄투척사건 관련 ‘원심창 청취서’ ② ‘아리오시 공사 암살 음모사건’ 문서③ ‘육삼정의거 예심종결 결정’ 문서 ④ ‘아리오시 공사 암살 음모 불령선인 일행 검거’ 관련 문서(더채널 김광만 PD 제공)

육삼정의거 日 문서, 사실 연구에 도움
평택 출신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원심창 의사와 백정기·이강훈 의사가 주도한 ‘중국 상해 육삼정의거’ 전모가 담긴 일본 외무성 문서가 최근 발견됐다.
올해로 80주년을 맞는 육삼정 의거에 관한 자료는 1987년 10월 일본에서 세 의사가 체포될 당시의 사진이 발견된 것 외에는 주로 회고와 증언·원심창 의사 판결문에 의존하고 있어 의거의 실상이 연구됐음에도 불구하고 ‘일제하 해외 3대 의거’라는 것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육삼정 의거는 가장 큰 목표였던 아리요시 아키라 공사를 처단하지 못한데다 관련자 대부분이 검거돼 흔히 실패한 거사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문서를 살펴보면 공사를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의거의 성과는 결코 작지 않음이 입증돼 역사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문서에는 1933년 11월 11일 동아일보에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국제 흑(黑) 테로단’이라고 크게 소개됐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육삼정 의거가 민족의 자긍심을 높임과 동시에 일제와 중국 국민당 친일파의 협잡도 세상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 확인됐다.

 
원심창 의사 ‘천진폭탄투척사건’ 기록 입수
특히 이번에 입수한 문서 중에는 <원심창 청취서>가 포함돼있다. 이 청취서에는 평택출신 원심창 의사가 주도했던 1932년 ‘천진일본영사관 관저 폭탄투척 사건’과 ‘일본군사령부 파괴사건’ 관련 내용이 기록돼있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사건을 밝히는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또한 문서에는 백정기 의사가 투척하려 했던 도시락폭탄은 윤봉길 의사가 투척했던 것과 같은 ‘쌍둥이 폭탄’이라는 기록도 있다.
폭탄은 백범 김구 선생이 비밀 제조업자에게 의뢰해 만든 도시락 형태의 폭탄 7개 가운데 하나로 그중 하나는 1932년 윤봉길 의사가 먼저 썼고 나머지는 백범이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였던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지도자 정화암에게 보냈는데 백정기 의사가 이것을 쓰려다 체포된 것이다.
일제는 내부문건에는 도시락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가로·세로·높이가 16.21cmx10.45cmx5cm라고 크기까지 자세히 묘사해둔 것으로 알려졌다.
원심창을 비롯해 백정기·이강훈·정화암 등은 일본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으므로 이 문서에는 관련자들이 어떤 인물인지 어디에서 은신하고 있는지까지도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감시해 왔음이 기록돼 있다.

밀정, 일본인 아닌 내부자 가능성 커
의거와 관련해서도 일제가 밀정을 통해 시기나 방법을 사전에 구체적으로 보고받았음이 드러났다. 일제가 그린 지도에는 백정기와 이강훈이 폭탄을 투척하고 원심창과 우당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이 망을 본 뒤 함께 도주하는 루트까지 자세히 그려져 있어 이번 문서 발견으로 의거를 노출시킨 밀정이 누구였는지에 관해서도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현재까지는 조직의 외곽에 있던 일본인 아나키스트의 밀고라고 추정돼 왔으나 문서상으로 보면 일제가 독립운동 세력의 깊숙한 고급정보까지 세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학계는 내부 공모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 원심창 주도 천진영사관 폭탄투척 사건 기사(조선중앙일보)
성주현 교수 일행, 올 3월 의거 현장 확인
특히, 육삼정 의거 현장 확인과 관련해서는 역사학계의 숨은 공로가 있어 더욱 의미가 크다. 그동안 의견이 분분했던 육삼정 의거가 일어났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청암대학교 성주현 연구교수 일행은 ‘육삼정의거 80주년, 그 현장을 가다’라는 본지(본지 제61호, 2013년 3월 20일자 기획특집 보도) 글에서 “육삼정 의거 현장은 중국 상하이시 홍쿠구 탕구로 346번지다. 그전까지는 자푸로 190호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사전에 답사한 곳도 자푸로 190호였다. 육삼정이 있었던 탕구로는 지금은 2차로로 확장됐지만 당시에는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말해 의거 현장이 잘 못 알려질 수 있었으나 치밀한 현장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성주현 교수 일행이 확인한 장소는 2013년 3월 17일 평택시민 대표단 등이 참여해 중국 상해에서 치렀던 ‘상해 육삼정의거 80주년 기념행사’ 당시 참가자들에게 공개됐으며 성주현 교수가 확인했던 장소는 이번 문서에서 확인된 의거 장소와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져 의미를 더한다.
발굴 실무를 맡은 이홍로 백정기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올해 3월 17일 평택과 공동 주관한 ‘상해 육삼정의거 80주년 기념행사’에서 새로 확인한 육삼정의 위치가 자료를 통해 일치하고 1930년대 상해지역 독립운동사를 다시 써야할 만큼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전했다.

원심창 의사, 올 12월의 독립운동가
황우갑 원심창의사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원심창 의사 기념사업 추진에 큰 활력이 되리라고 본다”며 “특히 육삼정의거 재조명을 위한 값진 사료발굴이라 뜻이 깊다. 관련단체와 연대해 학술세미나·자료발간 등을 통해 ‘일제하 3대 의거’로 국민들에게 널리 홍보되도록 지역사회가 뜻을 모아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한편, 원심창 의사는 진위군 서면 안정리 176번지(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태어나 14세의 나이로 3·1독립운동에 참가한 후 이듬해 ‘흑우회’에 가입해 1924년 8월 무정부주의 노동조합에서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1933년 육삼정의거 현장에서 체포돼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광복 이후 출옥해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내 한인들의 안정을 위해 ‘신조선건설동맹’과 ‘재일거류민단’ 설립에 노력했고 재일거류민단 초대 사무총장과 단장을 역임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통일촉진협의회’를 조직해 재일 한인사회를 이끌다 1973년 7월 4일 67세를 일기로 일본에서 영면했다. 원심창 의사는 2002년 7월의 독립운동가였던 민세 안재홍에 이어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2013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12월 전국 각 기관단체에 원심창 의사 관련 공적을 담은 홍보자료를 배포할 예정이다.

▲ 아리오시가 연희를 했던 중국 상해 육삼정
▲ 원심창 일행이 체포된 중국 상해 송강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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