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 시련 뒤에야 열매맺는다

홍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던 박승남 선생은 한 학기를 마치고서 가정형편상 더는 학교엘 다니지 못했습니다. 동화작가이자 교사였던 伯氏 박승일 선생도 또 소설가며 당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교수였던 백부伯父 박영준도 박승남 선생이 학업을 계속하는 일에는 아무 도움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박승남 선생은 이일 저일 손에 닿는 대로 시간을 보내다 군복무를 마치고서는 일찍이 박 선생의 재주를 눈여겨보신 김기주 교장선생님 추천으로 한광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박승남 선생이 학교 울타리 안에 기거하고 있기에 빈 시간이면 함께 만나 여러 가지 살아가는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근무가 끝나면 모두 퇴근을 하지만 하루 24시간 학교를 벗어날 일이 없는 박 선생은 시간이 나는 대로 혼자 미술실에 앉아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는 그림을 그릴 형편이 되질 못했기에 오랜 시간 붓을 놓고 살아왔다지만 박 선생 그림솜씨는 무엇을 그려도 ‘기운생동’이어서 붓질이 힘차고 튼튼했습니다.
그런데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었던 박승남 선생이 가끔씩 그림을 그리며 부르는 찬송가 노래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야! 박 선생 돈도 안 되는 그림 때려치우고 성악을 해보지 그래!
-헤 헤 헤… 야 이 친구야 그럼 노래는 돈이 된대!? 그러니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지 뭐!
-하긴…
그림도 공부할 여력이 없는 박 선생이 언제 성악공부를 했을 턱이 없겠지만 박 선생의 타고난 노래솜씨는 이름 난 성악가 보다 더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학교도 늘어나고 따라서 학교 선생이 부족했던 1970년대만 해도 모든 학과목에 해마다 교사를 뽑기 위해 시험을 치루는 ‘준교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자격기준은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특별한 제약 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교사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 덕분에 학교생활을 시작한지 2년 박승남 선생은 당당히 준교사 시험에 합격해서 교사자격증을 가진 정식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 선생이 한광학교에 다닐 때부터 학교에 계시던 연세가 드신 많은 선생님들은 성인이 되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박 선생을 여전히 제자이거나 학생취급을 했습니다. 조금 심하게 표현하면 학교 용인 취급을 하기도 했습니다. 무슨 일에든 여유로운 생활로 모나지 않은 성품을 가진 박 선생이었지만 부딪치는 일이 많아지자 박 선생은 자격증을 얻자마자 수원 영신여고로 자리를 옮기며 한광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태가 지난 어느 날 박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서울 을지로 6가 국립의료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전갈이었습니다. 소식을 받자마자 단숨에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박 선생은 두 눈을 다 싸맨 채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12월 31일 가족과 함께 택시를 타고 수원에 있는 서울농대 옆 교회로 송구영신 예배를 보러가던 박 선생은 도로 옆 논에 물을 부어 만든 임시 스케이트장에서 놀다가 나오던 차가 불법좌회전을 하는 것을 피하려고 택시는 급정거를 했는데 운전석 옆에 앉았던 박 선생은 다른 곳은 하나도 다치질 않았는데 그 충격으로 창졸간에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하늘만큼 소중한 눈을 잃은 것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요. 그래도 박 선생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얼마가 지나자 박 선생이 퇴원을 해서 쉬고 있는 수원집으로 병문안을 갔습니다.
-어때? 보여?
-아니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희미하게 느껴지기는 해
다행히 한쪽 눈 시신경이 조금은 살아있어 어둠과 빛을 구분하는 정도는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충격이 잦아들면 이제 조금씩은 나아지겠지…
눈이 보이지 않자 교직에서 물러난 박 선생은 생활근거지를 대구로 옮겨 맹인들을 위한 '겨자씨선교회'를 만들어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위해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통사고 뒤 받은 보상금으로는 선교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주에 작은 밭을 사서 호도농장을 시작했습니다.
‘겨자씨’ 선교회는 그 때만 해도 사람들에게 생소한 후원금으로 운영되는 단체였습니다.
-어이 이 선생 우리 선교회를 위해서 그림 하나 좀 보내줄 수 있어!?
박 선생은 눈이 멀쩡할 때 그려두었던 그림과 또 주위에서 기증받은 그림을 팔아 선교기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단지 눈만 보이지 않았지 박 선생은 손발을 걷어붙이고 직업을 가질 수 없는 맹인들의 생계를 도왔습니다. 선교모금을 위해서 일본도 다녀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맹인안내견을 기증받아 더 적극적인 활동을 했습니다.
호사다마라고 하나요? 선교회 일로 일상을 돌보는 일이 소홀했던 박 선생은 예상치도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 선생은 두 눈을 잃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박 선생은 결국 ‘겨자씨’ 선교회 일도 접고 말았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자 박 선생은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무주 호도나무 농장에 자리를 잡아 지금껏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박 선생에게 전화나 한번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봐. 박 선생! 그림을 못 그리는 대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어때!? 청춘은 늙어도 목소리는 늙지 않잖아!!!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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