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전국 최대 3·1운동 항쟁지, 6000명 참가

 평택 전역 23회 시위, 64명 사망
174명 부상, 257명 일경에 체포돼

3월 9일 현덕 첫 시위, 5월 10일까지 확산
일제, 평택 3·1운동 ‘가장 광포한 시위’ 평가
안성시 양성·원곡 4·1만세시위에도 영향 줘

 
올해는 3·1운동 93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날의 함성을 기리기 위해 전국 각 지역에서는 기념식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진행됐다. 평택은 전국적으로 볼 때 유일하게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던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무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민세 안재홍 선생의 추모일이 3월 1일인지라 이날 추모식으로 3·1운동을 기억할 뿐이다. 평택역 앞에서 평택의 전 지역주민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불렀던 그날의 함성을 기억해 내는 일이 필요한 시점이다.
평택지역의 3·1운동은 서울보다 10여 일 늦은 3월 9일 첫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5월 10일까지 약 2개월 동안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준비 중이던 3·1운동은 고종의 국장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망국의 설움과 고종의 죽음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만세운동을 확장하는데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지방에서는 고종의 국장에 맞추어 철시를 하거나 망곡식을 가졌다. 평택에서도 유창근(柳昌根) 등 20여 명이 3일간 철시하였으며, 조재희(趙載熙) 등 유생들은 비전산(碑前山)에서 망곡식을 가졌다.
평택지역에서 처음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된 곳은 현덕면으로 3월 9일 밤 각 마을마다 일제히 산에 올라가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다. 계두봉(鷄頭峰, 현 평택호 배수갑문에 위치)을 비롯하여 옥녀봉, 고등산 정상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현덕면의 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은 오성면에서도 3월 10일 주민들이 평야와 산에 올라가 만세시위를 했다. 같은 날 청북면에서도 토진리 오봉산과 마루산 정상에서 신포(현 청북면소재지) 주민들이 만세를 불렀다.
계두봉 첫 만세시위가 벌어진지 3일째인 3월 11일에는 이도상(李道相), 목준상(睦俊相), 심헌섭(沈憲燮), 한영수(韓泳洙), 안종철(安鍾喆), 안충수(安忠洙) 등의 주도로 평택 읍내에서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도상은 3월 5일경 서울과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는 소식을 듣고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심한 후 11일 오후 5시경 평택역 앞에서 장날에 모인 군중을 향해 만세를 선창한 후 군중을 선동하였고, 이 자리에 함께 있던 목준상, 심헌섭, 한영수, 민응환 등이 이에 동조하여 군중들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한동안 진정되었던 평택의 만세운동은 3월 31일 북면(현 진위면) 야막리와 봉남리에서 또다시 전개됐다. 야막리는 천도교 진위교구가 있는 곳으로 천도교인들이 많았다. 교인들은 박창훈(朴昌勳)의 주도로 북면(현 진위면) 면사무소가 있는 봉남리 천도교인들과 합세하여 5백여 명의 시위대를 형성한 후 오후 4시경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을 끌어내고 만세를 불렀다. 이날 만세시위에서는 박성백(朴成伯), 최구홍(崔九弘), 유동환(柳東煥), 전영록(全榮祿), 김봉희(金鳳熙) 등이 미리 만든 태극기로 시위대의 만세를 독려하였고, 이들의 주도로 북면사무소와 봉남리 경찰서 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른 후 각 마을로 행진하였다.
이어 4월 1일에는 평택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하게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4월 1일 만세시위는 이날 밤 9시 50분경 병남면(현 평택시 남부도시지역) 평택역 서쪽 약 1㎞ 떨어진 곳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를 시발로 해서 각 지역의 산 정상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서면(현 팽성읍 남부지역)과 부용면(현 팽성읍 북부지역)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평택으로 이동하다가 군문동 평택교 부근에서 만세를 불렀고, 송탄면과 고덕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진행하였다. 이처럼 평택 읍내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되자 진위경찰서는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면서 해산 시키기에 이르렀다. 12시경에야 만세시위가 잠잠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주민 4명이 희생됐으며 부상자가 10여 명에 달하였다. 이어 일제 경찰은 야간출입을 금지시켰고, 일본인 상점의 주인들은 다음날부터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또 고덕면에서는 율포리 주민 5백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만세시위를 진행했다. 이날 청북면에서는 안육만과 김원근이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에 호응하여 최만화, 안희문, 황순태, 정수만, 홍기성 등은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북면 은산리에서는 정경순과 최선유의 주도로 주민 30여 명이 모여 마을 뒷산에서 만세를 부른 후 봉남리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일제는 이날의 평택 만세시위를 안성의 양성과 원곡만세시위, 수원군 장안면과 우정면 면사무소 습격시위 등과 함께 ‘가장 광포(狂暴)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4월 1일의 만세운동은 연인원 3천여 명이 평택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했던 가장 규모가 컸던 만세운동으로 기록되어있다.
다음날 4월 2일에는 서탄면과 송탄면, 오성면, 북면 등에서 만세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서탄면에서는 윤기선(尹箕善) 면장의 주도로 4백여 명이 면사무소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송탄면에서는 이날 오후 10시 독곡리를 비롯하여 5백여 명이 각 마을마다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오성면에서도 안중리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였다. 이날 북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진행됐다.
이어 4월 3일 오성면에서 김용성(金容成), 공재록(孔在祿), 이사필(李思弼) 등은 주민들과 함께 봉오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날 평택 관내 각 지역에서도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후 1주일간 잠잠하던 만세시위는 4월 9일 고덕면과 10일 서탄면에서 다시 점화되었다. 4월 9일 고덕면에서는 자위단원 8명과 일본군인 8명이 만세시위 주동자를 검거하기 위한 현장 조사활동을 마치고 돌아갈 즈음인 오후 8시경,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만세를 불렀고, 이를 해산시키기 위해 일본군이 쏜 총에 주민 6~7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급박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어 10일 서탄면 금암리에서는 앞서 4월 2일에 있었던 만세시위 참여자 색출 조사를 진행하던 일제 경찰관에게 주민들이 실력행사로 대응하였다. 주민 40여 명이 경찰관을 포위하고 돌을 던졌으며, 이어 주민들이 주재소를 습격하려고 하자 주재소 경찰관은 총을 쏴 주민들을 해산시켰다. 이때도 주민 1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당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며, 이밖에도 이날 북면 사리와 수월암리에서는 주민들이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였다. 평택에서의 마지막 만세시위는 5월 10일 서해안 일대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주재소를 습격한 사건이었다.
평택 3·1운동의 역사적 위상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다른 지역보다 치열했던 평택 3·1운동의 역사적 위상은 첫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서울보다는 다소 늦었지만 3월 9일 첫 계두봉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는 5월 10일까지 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택 주민들만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평택의 만세운동은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안성지역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안성의 원곡과 양성에서 전개되었던 3·1운동은 평택의 영향을 받아 4월 1일과 2일에 대대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의 만세운동에는 평택 병남면 주민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셋째, 일제의 평가처럼 전국적으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일제는 평택의 3·1만세 시위를 “가장 광포(狂暴, 미쳐 날뛰듯이 매우 거칠고 사나움을 뜻함)한 만세시위”로 인식하였다. 이는 일제의 지배체제에 대한 평택주민들의 저항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평택의 3·1운동은 전 주민이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1959년 발행된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3·1운동에 참가한 평택 주민은 모두 22회에 걸쳐 6000여 명이었으며, 사망이 64명, 부상자가 174명, 일제 경찰에 채포된 주민이 257명에 이른다. 또 안성의 원곡·양성 만세시위에도 적지 않은 평택 주민이 참여했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볼 때 93년 전 평택의 3·1만세운동은 ‘평택인’으로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드려낸 가장 뜻 깊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성주현 교수│경기대 전통문화콘텐츠연구소 상임연구원
                     평택시사편찬위원회 위원
평택문화원│자료 및 사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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