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평택 통합, 1906년 대한제국기 만든 기틀에 근거 ‘성찰과 고민 필요’

▲ 일제강점기 평택 본정통 삼광자동차 평택정류소 거리(박성복 기자 소장)

‘평택’이라는 지명보다 ‘진위’가 앞서

오늘날 ‘평택’에 해당하는 지역의 통합은 언제부터 논의되었을까? 그러나 이에 앞서 ‘평택’이라는 지명이 언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 그리고 당시의 평택에 해당하는 지역이 어디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100년 전 ‘평택’이라는 공간(사실 100년 전에는 엄밀하게 평택이라는 지명이 아니라 ‘진위’라는 공간적 통합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평택이라는 공간은 매우 복잡하고 한편으로는 난제를 지니고 있다)에 대한 고찰이 가능하다.
‘평택’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고려사>다. 1236년인 고종 23년 9월 25일에 처음으로 평택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고려사> 56권 지(地) 권 10편에 의하면 “古河八縣, 高麗, 稱今名(고하팔현 고려 칭금명)”라고 했는데, 이는 “옛날에는 하팔현이었으며 고려시대에 지금의 명칭이다”라는 것으로 고려시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평택’이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언제 하팔현이 평택현으로 개명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당시의 평택은 어디쯤일까? 이를 정확하게 비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처럼 지도가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매우 불확실하다.
당시 평택은 양광도 천안부에 속했는데, 1236년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남경·평택·아주·하양창 등지에 나누어 주둔했다고 한다. 남경은 지금의 서울이고, 아주는 아산, 하양창은 아산 공세리 일대이다. 이로 본다면 평택은 아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이는 조선시대 평택현이 충청남도에 속했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평택현은 지금의 팽성읍 일대다.
그렇다면 ‘진위’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진위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다. 이에 따르면 “振威縣 本高句麗 釜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진위현 본고구려 부산현 경덕왕개명 금인지)”이며, 이는 “진위현은 본래 고구려 부산현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까지 그대로 따른다”는 것으로, 신라 경덕왕은 742년부터 765년까지 재위에 있었는데, 대체로 750년대에는 ‘진위’라는 지명이 사용됐을 것으로 본다.
이 두 기록을 보면 ‘진위’라는 지명은 ‘평택’이라는 지명보다는 500년 정도 앞섰다. 그렇기 때문에 1914년 군 통합을 할 때 평택이라는 군명보다는 진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는 평택보다는 진위가 역사적·지리적으로 정통성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일제 강점기 평택 본정통 상업조합 거리(박성복 기자 소장)

한말부터 지방구역 개편 계획하다
한말 1895년과 대한제국기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고자 했다. 1895년 5월 ‘칙령 제98호’에 의해 대대적인 지방제도의 개혁이 이뤄지게 됐다. 즉 조선 개국 이래 약 500년간 지속돼오던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채택됐으며 종래 부·목·군·현(府·牧·郡·縣) 등 다양하게 불려오던 하부 행정구역들이 군으로 통일되고 이를 23부 밑에 두도록 했다. 이때 진위현과 평택현은 각각 진위군과 평택군으로 변경됐으며 공주부의 관할에 뒀다.
그동안 경기도와 충청도로 각각 나누어져있던 진위지역과 평택지역이 공주부라는 하나의 광역체제 안에 편입됐다. 그러나 23부제는 이듬해인 1986년 13도제로 변경됨에 따라 진위군은 다시 경기도, 평택군은 충청남도에 각각 속하게 됐다. 23부제가 13도제로 다시 전환된 것은 기존의 군·현을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던 향반이나 중인층의 반발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1906년 들어 다시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시도했다. 당시 정부는 ‘지방제도조사소’를 조직하여 월경지(越境地, 飛地)와 들쑥날쑥한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斗入地)를 정리해 336군을 219개의 군으로 통폐합하고자 했지만 한국 정부와 일본 통감부의 견해 차이로 전면적인 통폐합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제국기 행정구역 개편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월경지·견아상입지의 정리를 단행하는 것을 계기로 군의 경계가 바뀌는 동시에 군의 면적·호구·세구 등의 격차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행정구역 개편은 지역민의 생활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역시 토호세력의 저항과 한·일 양측의 이견으로 군 통폐합은 군세의 균형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6년 지방행정구역 개편 작업은 <지방제도개정청의>와 <지방구역분합설명서>를 작성하였는데, 이때의 개편안이 1914년에 적지 않게 반영됐던 것이다.

1906년 분합안과 1914년 통폐합안의 비교
그렇다면 1906년 대한제국기 행정구역 개편은 언제 달성됐을까? 불행하게도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은 앞서 언급했듯이 1906년의 행정구역 개편안이 거의 그대로 반영됐던 것이다.
‘1906년 지방구역 분합안’은 기본적으로 수원군과 양성군의 견아두입지, 양성군·직산군·평택군의 월경지를 진위군으로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면수의 경우도 분합 이전은 13면이었지만 분합 이후에는 30개의 면으로 늘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1906년의 분합안은 수원군의 두입지 오타면과 양성군의 두입지 소고니면만 진위군에 통합돼 13개면이 15개면으로 늘어난 것에 불과했다. 이처럼 당시 분합안은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평택군의 소북면은 진위군에 넘겨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원군에 편입됐으며, 직산군의 월경지 경양면이 평택군에 포함돼 평택군은 6개면이 그대로 유지됐다.
전체적으로 볼 때 ‘1906년 분합안’은 ‘1914년 통폐합’에 그대로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충청남도의 평택군이 진위군에 통합된 것이 다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평택지역의 통합은 1906년에 그 기준이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 평택군 면폐합에 관한 건(국가기록원 소장)
평택군, 1914년 3월 1일 진위군으로 통합
진위군의 통합은 군 통합과 면 통합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먼저 군 통합을 살펴보자. 기존의 부와 군의 관할구역 넓이는 일정하지 않았다. 규모가 큰 곳은 500방리(方里, 1방리는 15.423㎢)가 넘었지만 작은 곳은 3방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불균형했다. 뿐만 아니라 인구수도 편차가 커서 많은 곳은 2만 8000여 호, 적은 곳은 1300여 호에 불과했다. 군의 경계 또한 들쑥날쑥해 행정상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일제는 군폐합의 기준을 면적은 40방리, 가구 수는 1만 호로 정했다. 기준에 미달될 경우는 인접 군에 폐합하고 이상인 군은 존치시키기로 해 전국적으로 97개 군이 폐합됐다. 충남의 평택군이 폐합돼 경기도 진위군에 합치게 된 것이다.
평택군이 진위군에 통합된 것은 행정적으로 볼 때 1914년 3월 1일이었으나 평택군이 진위군에 통합하기로 한 것은 이미 한해 전인 1913년에 결정됐다. 이러한 사항은 <매일신보> 1913년 12월 29일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기사에 의하면 기존 진위군, 당시 수원군에 속했던 종덕면·율북면·수북면·토진면·서신리면·청룡면·숙성면·오정면·언북면·포내면·현암면·안외면·승량면·가사면·광덕면, 그리고 충청남도의 평택군 일원이 진위군으로 통합했다. 이로써 오늘날 평택시에 해당하는 공간적 틀이 마련됐다. 그렇지만 1914년 3월 1일은 선언적 의미가 강했다.

▲ <평택시사신문>에 최초로 공개된 1939년 6월 발행 평택군 관내도(박성복 기자 소장)

1914년 4월 1일 면폐합, 사실상 통합 마무리

진위군 통합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어 관내의 면 폐합이 이어졌다. 먼저 진위군에 통합된 평택군에서 면폐합이 실시됐다. 1914년 3월 4일의 <평택군 면폐합에 관한 건>에 의하면 3개면이 2개면으로 폐합됐다.
폐군된 평택군은 읍내면·동면·서면 3개면이었지만 부용면과 서면으로 폐합됐다. 즉 읍내면의 경우 구창리·신환포·신덕리·창월리를 제외한 전부와 동면의 노와리·평궁리·추팔리를 합해 부용면으로, 서면의 전부와 동면의 남산리·대사동·석근리를 합하여 서면이 됐다. 부용면이라는 명칭은 객사리에 있는 부용산에서 유래했으며 부용면은 12개·서면은 13개로 모두 25개의 동리로 개편됐다.
폐군으로 진위군에 통합된 평택군이 3개면에서 2개면으로 소폭 축소된 반면 진위군은 면폐합으로 인해
 
통합 이전에는 15개면이었지만 통합 이후 5개면으로 대폭 축소됐다.
진위군 면폐합에서 논란이 됐던 것은 이서면의 야막리·수원군 율북리의 황구지·평택군 안성천 이북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은 하천을 경계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이나 행정상에 적지 않는 불편함이 뒤따랐다. 이에 따라 이들 지역은 기존 면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면에 편입됐다.
이에 앞서 1913년 11월 24일 수원군은 면폐합을 신청했으며, 이 신청안은 1914년 3월 26일 인가됐다. 당시 수원군 면폐합 중 청북면·현덕면·포승면·오성면이 진위군으로 편입됐다.
수원군의 일부가 1914년 12월 29일자 <매일신보>를 통해 진위군에 속한다고 했지만 이미 1913년 8월 6일에 결정됐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날짜 <부군 폐합에 관한 건>에 의하면 경기도장관이 수원군의 14개면을 진위군으로 넘겨줄 것을 정무총감에게 보고했기 때문이다.
1914년 부·군 폐합 후 진위군은 모두 11개면으로 구성됐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 진위군의 통폐합은 ‘경기도령 제3호’에 의거 1914년 4월 1일자로 시행됐다. 그리고 진위군의 군·면 폐합은 견아상입지와 월경지뿐만 아니라 지세(地勢)에 따라 진행된 것이었다.
 


 

진위군, 1938년 평택군으로 명칭 변경

앞서 언급했듯 지방구역의 통폐합은 한말 1895년과 대한제국기 1906년에 전개된 바 있었다. 그러나 지역 유지들의 저항과 한·일 간 견해 차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지방구역 개편은 일제 강점 직전인 1910년 4월에도 시도됐으며 최종적으로 1914년에 이뤄졌다.
1914년 부·군폐합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논란 중에 있다. 식민통치 확립을 위한 것이 목적이라는 비판적 평가가 많으며 이러한 측면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군폐합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914년 부·군 폐합이 ‘종래의 행정구역인 구한국 정부시대의 것을 답습해 구역·인구·자력이 부동하다’고 한 점은 그 틀이 1906년에 이미 마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역시 통감부라는 한계성이 있지만 우리의 의지가 크게 반영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1914년 부·군 폐합은 ‘시정상의 편의와 경비 절감’이 목적이었으며, 시정상의 편의란 ‘행정 일원화’를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1914년 부·군 폐합은 1906년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남긴 것이다.
한편 1914년 폐군된 평택군은 진위군에 통합됐고, 통합된 진위군은 1938년 9월 24일 다시 평택군으로 변경됐다.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변경된 것은 병남면이 평택읍으로 승격됐기 때문이며, 이는 평택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인이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진위군의 주도층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100년 성찰, 미래위한 계기 마련해야
100년이라는 시간은 적지 않은 역사다. 역사는 흔히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리고 역사학자 카아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역사는 과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1914년 평택의 통합, 진정한 의미에서 진위로의 통합은 분명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지만 1914년의 통합이 평택을 발목 잡을 수는 없다고 판단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당시의 통합은 전적으로 일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1895년과 1906년 지방구역 개편의 연장선이라는 점이다. 또한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이다.
100년을 맞는 통합에 대한 인식은 지난 대토론회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914년 통합 100년이 발목 잡는 100년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100년을 내다볼 수 있는 성찰이 됐으면 한다. 그리고 모두가 진정성을 가지고 평택 통합 100년을 바라볼 수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글·성주현 청암대학교 연구교수
사진·박성복 기자
편집·정보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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