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 정취 속 화합으로 다져진 곳 ‘은곡’

“외지인과 원주민, 사는 방식 자체가 달라”
“문화재, 무조건적인 보호만이 해답 아냐”

 
“원주민과 외지인들이 잘 융화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직업도 다르고 생활수준도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분들은 마을 일에 협조를 안 한다기 보다는 관심 자체가 없는 것 같습니다”
2000년부터 마을 이장 일을 보기 시작해 이제는 고참이 된 진성찬 현덕면 덕목5리 이장에게도 갈수록 늘어만 가는 외지인과 원주민 사이의 소통 문제는 여간해서 풀기 어려운 난제로 남아 있다. 한적하기만 한 시골 마을에 외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지원특별법’으로 마을 주변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예전에는 간혹 가다 한집 정도 들어오거나 했을 뿐 사실상 외지인들의 이주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우리 마을은 오지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개발이 시작되면서 경치 좋은 강변에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택지가 꾸며지고 땅값이 오르더군요”
 
산꼭대기에 난데없는 미장원이 들어선다는 풍문이 돌 정도로 개발에 대한 열기가 마을을 흔들었으나 곧이어 닥친 전국적인 부동산시장 침체에 그 열기는 오래 가지 못하고 시들고 말았다.
“그래도 상당수 가구가 입주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기업 간부나 대학 교수 등이 입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와는 사는 수준이 다른 분들이죠. 그래서인지 때로는 원주민들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죠. 하지만 그래도 이제 우리 마을에 적을 둔 주민이니 이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도울 작정입니다”
진성찬 이장은 2014년 현덕면이장협의회장에 올랐다. 마을 일만 해도 밤낮이 없을 정도로 바쁜 그에게 또 하나의 무거운 사명이 맡겨진 셈이다.
“협의회장일을 하게 되면 우리 마을 뿐 아니라 현덕면 전체를 돌아보는 넓은 시각이 필요할 텐데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도 그동안 했던 것처럼 소통을 앞세우다보면 주민들이 나서서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이장은 주민들의 협조 없이는 힘들거든요”

한마을 두 가족, 끈기로 이뤄낸 소통
현덕면 덕목5리는 새로게 건축되고 있는 현덕~팽성간 평택대교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평택호반을 앞마당으로 자리한 곳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벼농사에 의지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만 평택호방조제가 건설되기 이전 덕목5리는 주 생계수단이 고기잡이였던 전형적인 어촌마을이었다.
“전체적인 삶의 수준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인천 소래포구나 삽교호를 보면서 가끔은 평택호 방조제가 건설되지 않았으면 우리 마을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농촌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여간 고되거니와 쌀농사만으로는 자식 교육도 시키기 힘든 것이 현실이니까요. 우리 마을에도 직장에 나가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제법 됩니다”
덕목5리는 언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마을로 이뤄져 있다. 덕목4리에 가까운 쪽은 ‘연화’라고 불렸으며 언덕너머는 ‘은곡’이라고 불렸다.
“마을 앞 평택호반에 연꽃이 많습니다. 해마다 큰물이 지면 그 꽃들이 침수된 마을로 흘러들어오곤 해서 ‘연화’라고 불렸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은곡’은 말 그대로 사람이 숨어 지내던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어감이 좋지 않다고 어른신들은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곡에는 여량 진(陳)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아왔다. 하지만 ‘은곡’이라는 이름을 남긴 사람은 다름 아닌 덕목4리 입향조로 알려진 ‘공부’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연유로 인해 강한 씨족 마을을 이루고 있던 진 씨들에게 ‘은곡’이라는 말은 썩 달갑지 않은 것임을 짐작케 한다.
지정학적으로 나뉘어 있던 두 마을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묶이면서 사소한 다툼이 많았다. 한 곳에서 이장을 하면 다른 한 곳에서 새마을지도자를 하는가 하면 젊은 청년들의 주먹질도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을 정도로 한 마을 두 지역의 경쟁은 사뭇 치열했다.
“너무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소통에 문제가 있었죠. 두 지역의 화합 없이는 발전이 없겠다 싶어 제가 이장이 되고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벽을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노력 덕분이랄까. 전통처럼 이어오던 갈등은 점차 사라지고 마을 사람들은 번갈아 이장을 맡던 관습을 무시하고 진성찬 이장을 15년 째 마을 대표로 밀어주고 있다.  
 
문화재, 보호와 생존의 갈림길에 서다
덕목5리에는 보물 제565호 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된 심복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심복사를 바라보는 마을사람들의 심정은 그다지 살갑지 않다. 마을길 포장을 심복사에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 대로가 처음 뚫리고 버스가 들어왔을 때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버스가 이용객이 없어 끊기는 일이 벌어질까봐 마을 부녀회원들이 순번을 정해 버스를 타곤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마을엔 교통문제가 절실했으니까요. 다리 아픈 노인들에게 버스는 생명줄과 같죠”
오전에 들어온 버스를 타고 나가 읍내에서 볼일을 보고 다시 마을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서너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하는 일이 잦은 ‘은곡’마을 사람들의 최대 숙원은 평택호반에서 멈춰버린 버스길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사찰측에서 문화재보호구역 안이라고 환경오염을 이유로 포장을 허락해주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포장된 농로를 절차를 문제 삼아 걷어낸 일도 있었죠. 문화재 보호는 분명히 필요하지만 사람도 함께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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