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리·통복리·덕우리 등 평택 전역으로 확산
일제의 조세 증세에 대한 저항적 성격도 있어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 박봉진 윤용규 양 씨의 발기로 오는 30일(화요일)에 금주단연발기총회(禁酒斷煙發起總會) 개최한다더라” <동아일보 1923년 1월 29일>

1923년 초 들어 평택에서 흥미 있는 화두는 ‘금주(禁酒)’와 ‘단연(斷煙)’이었다. 일제강점기 금주단연운동은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단연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다 아시다시피 ‘국채보상운동’이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서 도입한 부채 1300만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자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를 위해 남성들은 3개월 동안 금연을 해서 모은 돈으로 부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남성 중심이었지만 여성들도 비녀 헌납·절식운동 등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전국적으로 전개한 금주·단연운동은 일제 식민지배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이 강하였다. 일종의 조세저항운동이었다. 일제는 증세를 위해 일상생활이 된 술과 담배에 세금을 부여하였다. 주세와 연초세는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적지 않은 불평을 가져왔고,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 단연운동은 제주에서 시작되었고 평택에서는 1923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평택의 첫 단연운동은 1922년 12월 20일 통복리 정억만·김정철의 발기로 조직된 단연상조회였다. 단연상조회는 매월 20전씩 모아 관혼상제에 보조하기도 하였으며, 회원 중에 흡연할 경우에는 벌금으로 2원을 내게 했다. 이후 단연운동은 금주운동과 함께 이내 평택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봉남리에도 28명의 모여 단연동맹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은 이병선, 이사는 전좌룡·박성백 등이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덕우리의 이기학·박원희 등 30여 명, 통복리에는 박상오·안종관 등 33명, 오성면 신리에서는 임용준 등 20여 호가 각각 단연동맹회를 조직하였고, 그 기금을 공익사업에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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