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눈이 먼 사람들

사람들이 예수 앞에 귀머거리를 데려왔습니다. 주님이시어 이 사람은 혀가 굳어 말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합니다.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외쳤습니다.
- 에바다! 열리거라!
예수가 던진 그 한마디에 귀머거리는 귀가열리고 굳었던 혀가 풀려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약성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 얘 너 뭐 먹고 싶으니?
- … …
-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 …
두 번째 물음에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던 계집아이는 혼자 속엣 말로 중얼거리듯
- 아이스크림! 하고 대답했습니다.
1978년 평택군 팽성읍 노와리 ‘에바다’ 농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너 말 할 줄 알어?
다시 물어 본 말에 계집아이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지금껏 우리들이 곁에서 주고받는 말을 다 듣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계집아이는 사지가 멀쩡한 아이들이 갈 수 있는 다른 ‘고아원’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농아원으로 들어왔을까요?
‘에바다’ 농아원엘 드나들지 않았을 때는 전혀 관심을 갖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자 농아원 검은 속이 조금씩 조금씩 들여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서울 어느 순복음교회의 젊은 목사였던 에바다 농아원 이사장은 자가용차에 제 아이를 태우고는 가끔씩 놀러오듯 농아원을 드나들었지만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과는 서로 소 닭보듯 관심조차 없는 행동만 하다가는 농아원 사무실로 들어가 버리곤 했고 농아원의 실질적인 경영자는 아이들이 고모라고 하는 그 목사의 누나였습니다.
직책은 ‘총무’였고 그래서 아이들도 그를 ‘총무’라고 불렀습니다. 일요일이면 어쩌다가?안정리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미군들이 놀러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이들과 농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미군이 농아원에 오면서 가지고 오는 선물은 쌀이 한 댓가마니 정도 들어갈법한 큰 자루에다 미군부대 안에서 먹고 버린 맥주깡통을 주워 담아온 것으로 돈을 주고 사는 것 보다 백배 천배는 더 정성을 들인 값어치 있는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큰 자루에다 맥주깡통을 다 채우려면 아마도 하루에 몇 시간씩 한 달 이상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지요.
1980년인가 봅니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출근을 하고 교무실에서 수업준비를 하는데 웬 학생아이가 헐레벌떡 교무실로 들어서더니 무슨 큰일이라도 난 양 학교 교문에서 누가 날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 이 이른 시간에 혹 학부형이라면 아이들에게 물어서 교무실까지 찾아오실텐데 누구지???
그리고는 서둘러 교문 쪽으로 나갔습니다.
- 선생님! 우리 아이들 어디로 빼돌렸어요!?
- … …???
찾아온 사람은 전혀 뜻밖에 ‘에바다’ 농아원 총무였습니다.
- 우리 애들 다 어디로 보냈냐구요!?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요!?
새파랗게 독이 오른 표정으로 들이대듯 경상도 사투리로 쏘아대는 이야긴즉슨 지난밤에 큰 남자아이들 4명이 이동진 선생이 취직을 시켜준다고 하면서 농아원을 빠져나갔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농아원을 떠났던 아이들은 하나 둘 다시 농아원으로 돌아왔고 나중에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녀석들이 농아원을 빠져나가면서 핑계를 댈 것이 없으니까 ‘이동진 선생이 일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핑계를 댄 것이었습니다.
화식이는 농아원에 사는 큰 아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눈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대화는 주로 필담으로 했지만 웬만한 것은 말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했습니다. 신경을 써서 들으면 화식이가 하는 웬만한 말은 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농아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농아원에서 잔뼈가 굵은 친구들은 모두 자신의 나이를 19살이라거나 21-2살이라고 말했지만 외모를 보면 거의가 다 30살을 훌쩍 넘긴 것 같았습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럴까요? 특히 화식이는 마흔이 다 된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모든 고아원-보육기관이 다 그러하듯 만 18세가 넘으면 보육기관을 떠나야 했기에 아이들은 하나같이 나이를 속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고아들이기에 정확하게 제 나이를 모르기도 했습니다.

 
또 엄연히 보육시설인 ‘에바다’ 농아원에는 버젓이 부모가 살아있는 농아들도 부모가 없는 고아행세를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1970~80년대만 해도 먹고 살기 힘든 농촌생활에서 멀쩡한 아이들조차 중학교를 가지 못하던 시절에 말 못하는 아이를 농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요.
그렇다고 집에 데리고 있자니 농사일에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동네에서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하며 또 집안에 장애인이 있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사회풍조다 보니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그냥 눈 딱 감고 아이를 농아원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 머릿수로 평택군청에서 지원금을 받아내는 농아원 입장에서 보면 어차피 먹는 것이야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식량으로 넉넉히 해결할 수 있는데다가 밑천이 안 드는 장사이고 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였던 셈이었고 결국 그런 부실한 행정관리가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만 것입니다.

이동진은 홍익대 미대 卒, 한광고등학교 교사, MBC창작동요제 대상곡 ‘노을’의 작사가다.
 ※ 블로그 http://blog.naver.com/jaa_yoo(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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