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임스 써버 글·그림/김지연 옮김/뗀데데로
제임스 써버(1894~1961)는 미국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작가이며 <뉴스위크>는 헤밍웨이·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국민 작가’라 평했다. 대표적인 유머 작가인 그는 7살에 형제들과 놀다 한 쪽 눈을 잃었고 다른 한 눈은 평생에 걸쳐 시력이 저하돼 50대 이후 거의 실명 상태로 글과 그림을 그렸다. 그의 이력을 모른 채 읽는다면 그저 밝고 명랑한 사람일 것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으니 마크 트웨인의 “알고 보면 유머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천국은 유머가 없는 셈이다”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시력 때문에 또래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글쓰기와 공상에 빠져들고 대학 학위도 받지 못한 제임스 써버는 자신의 예민함과 불안을 작품으로 훌륭히 활용하였다. “재담가는 타인을 희화화하고 풍자가는 사회를 희화화하며, 유머 작가는 자신을 희화화한다” 그의 말이다. 또 “단편 작가들은 명랑하고 근심 걱정이 없는 줄 알고들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실제로 그들은 흠칫 놀라고 불안해하기 일쑤다. (중략).... 그러한 유형의 글쓰기는 유쾌한 자기표현이 될 수 없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 불쑥 찾아오는 거대한 불안을 드러내는 것뿐이다”고 말한다.
그의 글쓰기에 대한 소회는 소시민의 불안한 느낌과 다를 바 없다. “나라가 위태로워도 잠들 수 있지만, 새벽 3시에 식료품 저장실에서 이상한 소리라도 나면 위장까지 공포에 질린다. 단편 작가는 국가가 별로 선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고, 지표면이 놀랄 만큼 줄어들고 있으며 우주가 꾸준히 냉각되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세 가지 문제 중 어느 하나도 자신이 겪는 문제의 절반만큼도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세계 제1차 대전·대공황·실명 등의 삶의 무거움과 우울을 짐짓 모른 척, 냉소어린 쉽고 짧은 문장으로 드러낸다. “단편 작가들의 ‘시간’이 그리 읽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독자들은 그저 작가 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될 뿐이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나는 그래도 합리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낄 테니, 그게 바로 이런 글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이다. ‘월터 미티’의 사전적 정의가 ‘평범한 삶을 살면서 터무니없는 공상을 하는 사람’일 정도로 고단한 삶을 공상으로 연명하는 인물이다.
자동차 속도를 줄이라는 아내의 잔소리에 월터 미티는 해군 중령이 되어 속도전으로 밀어붙인다. 세계 1차 대전과 대공황 시기 중년 남성들의 불안과 위기를 웃음 너머 애처로움으로 표현하였다는 이 작품은 70여 년이 흐른 2013년, 벤 스틸러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로 다시 태어났다. 같은 직장의 여성에게 말 한마디 못 붙이는 월터는 해본 것 없고 가본 곳 없고 특별한 일도 없다. 자신의 분야에는 전문가지만 일상에서는 ‘멍 때리며 딴 생각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일 뿐이다. 제임스 써버의 ‘월터 미티’가 공상과 냉소 사이에서 현실을 버티고 있다면 벤 스틸러의 ‘월터 미티’는 여행을 통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어느 쪽이든 고마운 일이다. 작가들의 상상력이 빚은 ‘그(그녀)’들 덕분에 우리는 현실을 견디고 있다.

 

 

 

 

 

이수경 사서
평택시립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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