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음력설이면 윷놀이 대회 열어
언론사 주최, 광고하고 상품도 내걸고

“본사 평택지국 주최와 조선일보 평택지국 후원으로 오는 2월 3일 상오 10시부터 평택역전 조일관(朝日?)에서 척사대회를 개최할 터인 바, 누구를 물론하고 회비 금 2원을 첨부하여 다수 입회하기를 바란다고”(동아일보 1925년 1월 30일)

매년 음력 1월 1일을 요즘은 ‘설날’이라고 하지만 한 때는 ‘구정’ ‘음력설’ ‘민속의 날’ 등으로 불리는 시절이 있었다. 또 이중과세라 하여 설날이 없었던 시기도 있었다. 설은 한자로는 신일(愼日)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간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묵은 1년은 지나가고 설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1년이 시작되는데 1년의 운수는 새해 첫 날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설날에는 다양한 시세풍속 즉 민속놀이가 전개된다. 그중에서도 윷놀이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 윷놀이는 일제강점기에는 척사대회(擲柶大會)라 불렸다. ‘윷을 던지는 놀이 모임’이라는 뜻이다.
요즘도 설날이면 마을마다 윷놀이가 있어 친목을 다지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윷놀이는 지역마다 성행하였다. 평택은 매년 설날이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국에서 윷놀이를 적극적으로 개최하였다. 때로는 진위청년회에서도 후원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신문에 광고를 하기도 하였다. 1925년 1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설을 맞아 조일관이라는 여관에서 윷놀이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윷놀이에 참가하려면 2원을 내야만 했다. 상품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는데 1등은 금시계·2등은 은수저·3등은 둥근 벽시계 등을 내걸었다. 윷놀이는 2명이 한 조가 되어 참가자를 몇 개의 조로 편성하여 진행되었다.
1년 앞선 1924년 설에는 진위군·천안군·수원군·경성부·아산군 등 ‘5군 연합척사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5군 연합척사대회 참가비는 5원이었다. 당시 윷놀이 대회에서 1등·3등·4등을 진위군에서 차지하였다. 1등은 유재한(劉載漢)·김종구(金鍾九), 3등은 진위군 유원춘(劉元春)·박수훈(朴樹勳), 4등은 정용운(鄭容運)·박건?(朴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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