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가마니, 전국에서 최고로 인정받아
겨울 농촌 부업, 1934년 230만장 생산

 

“진위군(振威郡)의 유일한 농촌의 부업으로 생산되는 평택(平澤)의 가마니는 전 조선적으로는 이름이 높음은 이미 세인이 공지하는 바이어니와 금년 진위군농회(振威郡農會)의 통계에 의하면 가마니 생산액은 놀랍게도 2백 3십만 매나 되어 그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20만 원이나 된다 하며 작년에 비하여 50만 매나 증가되어 빈궁에 빠져 허덕이는 농민의 빈주먹으로 들어갔다더라”(동아일보 1934년 2월 8일)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은 본격적으로 전시체제가 시작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일본의 대륙침략은 1937년 중일전쟁·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시체제기 식민지 조선인의 삶은 그야말로 빈궁(貧窮)한 생활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관변단체인 조선농회(朝鮮農會)는 설립 초기에는 농사의 지도·장려에만 주력하였으나 전시체제기에는 권업행정의 하청기관으로서 역할이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농회는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각종 경제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식민지 농민의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농회가 평택에도 조직되었다.
전시체제기 농촌의 부업으로 가마니 짜기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가을걷이를 마친 농촌의 한 겨울은 가마니를 짜는 것이 주요한 일이었다. 모든 농촌에서는 가마니를 생산했지만 전국적으로 평택에서 짠 가마니가 가장 유명하였다. 평택 가마니가 유명하였던 것은 평택 쌀이 그만큼 유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가마니 짜기는 경진대회를 통해 생산량을 크게 늘리기도 했다. 1934년 한 겨울에 생산한 가마니는 무려 230만 장이었다. 이는 1933년보다 50만 장이나 많이 생산한 것이었다. 가격으로 환산하면 20만원으로 가마니 장당 8원 7전 정도였다. 1920년 1월에 1만 5066장(장당 33전)을 생산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였다. 1924년 5월 9일에는 평택역에서 ‘가마니 짜기 경기회’를 개최한 바 있는데, 11개면에서 138명(여자 13)이 참가하였다. 1등은 2명에 각 5원·2등 2명에 각 4원·3등 2명에 각 3원씩·그리고 4등부터 10등까지는 가마솥(釜鼎)이나 농기구를 부상으로 주었다. 그밖에 등외 참가자에게는 호미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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