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아원에서 먹던 아이스크림


 
시간이 지나면서
‘에바다’ 농아원이
부정과 부패 온상이 되어
시끄럽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바로
농아원 원아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많은 농아원 아이들 웃는 모습이
지금도 환히 보입니다


1980년에도 우리는 계속 ‘에바다’ 농아원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농아원 아이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아이들에게 가지고 오는 선물에 떡은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었습니다. 봄에는 쑥떡·인절미·절편·꿀떡 그리고 겨울에는 시루떡과 가래떡. 하지만 그 때만 해도 농아원 아이들이 배를 곯던 시절이 아니었음에도 6·25때 배고픔을 겪어본 어른들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떡을 가장 배가 든든해지는 선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농아원 아이들이 가장 먹기 싫어하는 음식은 단연코 떡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 바깥에 나가지 않으면 쉽게 먹을 수 없는 간식을 생각한 끝에
-얘! 아이스크림 어때? 좋아!
그래서 우리는 먼저 안정리 가는 버스를 타고 객사리에서 내려 노와리 농아원으로 걸어가서는 평택 읍내 아이스크림 대리점으로 전화를 하면 ‘부라보콘’ 아이스크림은 냉동 배달차에 실려 바람같이 달려왔고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아이들은 너무나도 행복해서 벌린 입을 다물질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농아원엘 찾아오는 그 어느 누구도 쉽게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선물로 사가지고 올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것입니다.
1981년 한광고등학교 16회 졸업생 정운호 君은 별명이 ‘빈대’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노는 시간은 늘 운호 담당이었습니다. 말을 듣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놀이시간에는 농아원 선생님이 수화통역을 해주었습니다.
-자! 이 번에는 ‘빈대’ 정운호의 무술시범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농아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수화통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선생님이 수화를 해도 아이들은 못 알아먹겠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습니다. 바로 ‘빈대’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었지요. ‘빈대’ 장작불을 때던 시절 온돌방 틈새에 숨어 있다가 한밤중에 나와서 사람의 피를 빨아먹던 해충 ‘빈대’
하지만 19공탄을 때기 시작하면서 연탄가스 독성을 견뎌내지 못한 빈대는 모두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6·25때 그리고 군대에서 조차 1970년대까지 내무반에서 사람을 괴롭히던 ‘빈대’ 그러나 80년도만 해도 더는 ‘빈대’를 어디서든 볼 수 없는 시절이 되었기에 빈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정운호 별명이 빈대가 된 것은 단 한 번도 점심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와 본 적이 없는 운호가 점심시간이 되면 젓가락만 들고 온 교실을 다 돌아다니면 아이들에게 ‘빈대붙어서’ 점심을 해결한다고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이었습니다.
화식이는 가끔 학교로 놀러왔습니다. 평택 읍내에 나와 목욕을 하고 단체로 짜장면을 먹고 나서는 농아원으로 가지 않고 따로 학교에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여름철에야 개울에 가서 멱을 감을 수도 있고 찬물로 목욕도 할 수 있지만 난방시설도 변변치 못했던 추운 겨울에는 씻을 곳이 없어 읍내로 단체 목욕을 나왔는데 ‘제일탕’에서는 농아원 아이들에게 언제나 무상으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또 짜장면도 중국집에서 농아원 아이들에게 때마다 공짜로 먹여주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병원에서는 무료진료도 해주고 또 약값도 받질 않았지요. 학교로 찾아온 화식이는 씻는다고 씻기는 했지만 목욕탕에서는 물장난을 하며 놀다왔는지 꾀죄죄한 모습은 변함없으나 그래도 한결 인물은 나아보였습니다. 화식이 소원은 어서 빨리 돈을 벌고 예쁜 색시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이 거의 없던 시절이다 보니 언어표현이 불가능한 화식이가 일자리를 얻을 곳은 어디에서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1982년 학교를 떠나면서 ‘에바다’ 농아원과 맺었던 인연은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맺은 인연이 영영 끊어지는 것은 아니었지요. 2005년 겨울 천안역에서 서울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은 분명 화식이었습니다. 우리는 부둥켜안았습니다.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고 있어 우리는 서둘러 헤어져야 했습니다. 화식이는 얼른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더니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 때 나는 핸드폰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좋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을 주고받지는 못해도 한글만 깨우친다면 얼마든지 핸드폰 문자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고 보니 누구라도 다 현대 과학문명의 도움을 받고 살지만 아마도 가장 큰 수혜자 가운데 한 사람은 바로 화식이와 같은 농아자聾啞者들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에바다’ 농아원이 부정과 부패 온상이 되어 시끄럽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바로 농아원 원아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많은 농아원 아이들 웃는 모습이 지금도 환히 보입니다. ‘에바다’ 농아원이 썩어문드러지도록 오랜 시간 방치한 관리 감독기관과 서로가 먹고살기 힘들어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사회가 뒤늦게 나서서 ‘에바다’ 농아원을 정상화 시키겠다고 하는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인과응보였지요.
아직도 사회적 보호를 받아야 할 이웃이 적지 않은 오늘 ‘에바다’ 농아원 사건을 되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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