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안성 간 철도부설 대책
평택~안성 간 도로완수 결의

“진위군 평택발전회의 발기로 지난 11일 오후 7시부터 평택 연무장에서 시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발기인 측으로 본 대회 취지를 듣건대, 진위지방은 2만 정보여의 밭으로 연산 40만 석의 곡물 집산지인 평택은 … (중략) … 인천 경성 방면에 수송될 터인즉 도로만 완전히 수선되면 별로히 영향이 없을 것이라 하며 유창근 씨 사회 하에 의사를 진행하여 아래와 같이 결의하였다더라. … (하략) …”(동아일보 1925년 3월 14일)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평택은 크게 발전했다. 평택이 오늘날과 같이 발전하게 된 것은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고 평택에 역이 생기면서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진위군의 중심지는 군청이 있던 봉남리였다.
평택역은 경기 남부지역과 충남 일대에서 생산된 곡물의 집산지였다. 진위군만 하여도 20만 정보의 밭에서 40만 석의 곡물을 생산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농산물의 생산은 평택을 전국 의 ‘우수한 지위’로 알릴 수 있었고, 이를 20여 년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위군에 이웃한 안성군에서 천안군을 잇는 철도를 부설하기로 함에 따라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안성군은 경부선이 개통되기 전만 해도 경기 남부지역의 물산집산지였지만 경부선이 개통됨에 따라 그 역할을 진위군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에 안성지역의 유지들은 1921년 봄부터 천안에서 안성과 장호원을 잇는 철도 부설을 위해 ‘안성철도기성회’를 조직하여 안성선 유치에 적극 나섰다. 뿐만 아니라 천안군에서도 1923년 4월 안성선 철도 부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시민대회를 가진 바 있었다. 이에 경남철도주식회사에서 1923년 겨울부터 안성과 천안을 잇는 안성선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24년 가을에 개통할 예정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 당하자 진위군 유지들 즉 유창근·성주한·이학준 등과 일본인 유지들이 조직한 평택발전회의 발기로 천안 안성간 철도 부설에 대응하여 평택과 안성을 잇는 도로를 확장하고 수선해줄 것을 경기도청에 진정하고 지방비 보조를 청구하기로 결의하였다. 평택발전회는 1923년 1월 28일 소비절약 선전 강연회를 개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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