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평택리 장로교회 설립
남 20·여 20 등 70명 모집


 
“진위군 평택리 은평강습회에서는 오는 신학기에 교무를 일층 확장하고 보통과 1학년 남 20명, 여 20명, 동 2학년 남 30명을 모집한다고 하며, 출원기일은 4월 5일이라더라.”(동아일보 1923년 3월 21일)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 직후에는 교육열이 그리 높지 않았다. 이는 망국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일제 식민정책의 교육에 저항하는 의미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교육열은 급속하게 높아졌다. 이는 3·1운동으로 즉시 독립하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일제의 강압적 진압으로 독립의 희망이 사라져갔다. 이에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 결과 1920년대 들어 각종 교육기관들이 설립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강습소였다. 강습소는 정규 교육기관은 아니었지만 일제는 당국의 인가를 받아야만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철저하게 통제했다. 1920년대 진위군에는 은평강습소를 비롯해 일신강습소·진서강습소·운정강습소 등 강습소들이 설립되어 초등교육을 담당했다.
은평강습소는 평택리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설립하였는데,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약간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1일자에는 ‘지난 11월 중 당국에 인가 신청하여 이번에 인가되어’라고 하였고, 같은 해 1월 15일자에는 ‘객년 8월부터 개학하였는데’라고 했다. 이 두 기사를 종합하면 1922년 8월에 개학을 하고 11월에 인가 신청, 12월에 인가를 받았다는 것인데, 약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학교는 인가를 받은 후에 학생을 모집하기 때문이다.
1923년 신학기를 맞아 모집한 신입생은 1학년에 남자 20명, 여자 20명, 그리고 2학년에 남자 30명으로 모두 70명이었다. 1922년 8월 개학 당시 학생은 확인되지 않지만 1923년 1월 15일 현재 60명이었다. 그리고 모집기간은 4월 5일까지였다. 이로 볼 때 은평강습소는 2년제 교육기관이었다. 1923년 신학기에는 70명을 모집했지만 최대 수용 규모는 200명 정도였다. 이후 은평강습소는 학교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강연회 등을 개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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