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에서 공세리까지 조세의 사회적 연결망

 

 

대동법시행기념비·아산 공세곶고지 둘러봐
민생정치 실현 훌륭한 경제학자 김육 만나

3월 29일 아침, 어느새 봄꽃의 봉우리가 돋기 시작하는 나들이하기 참 좋은 날이다. 약간의 빗방울이 떨어지지만 우산 없이 다닐만하여 덥지 않은 날이다. 시청에서 출발,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소사동대동법시행기념비’ 앞에 다다랐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우리의 문화재는 존재하고 있다.
3월의 평택 역사 둘레길 걷기의 테마는 ‘세금’이다. 다소 무거운 주제인 듯 했지만 은혜중학교 김일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과 섬세한 설명은 그런 걱정을 금방 사라지게 했다.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왜 소사동의 길목에 있을까? 그리고 저 비석에는 도대체 뭐라고 쓰여 있을까? 어린 시절 이곳을 매일 지나다니며 등하교를 해야 했던 나에게 이번 답사는 아주 뜻 깊은 기회였다.
비문에는 “대동법을 설정하여 국민간의 상거래를 보다 원활히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1659년(효종 10)에 영의정 김육(金堉)이 충청감사로 있으면서 삼남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할 때 대동법 시행을 만인에게 알리고, 백성을 위하는 그 법의 덕을 기리기 위해 삼남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설치 한 것이라 한다.
대동법은 잘 알다시피 정부의 재정수입 중 하나인 특산물의 납세를 쌀로 내게끔 하는 것이다. 조세 지불수단이 쌀로 바뀌면서 무리한 과세나 비생산 물품이 부과되는 폐해를 줄여 민중들의 삶의 애환 또한 줄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공인(貢人)을 통해 물품을 구입하여 수공업과 유통경제가 발달하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져 이후 화폐경제의 등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경제정책에 탁월한 식견을 지닌 김육은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요 실학자로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으로 대동법을 끊임없이 주장했다고 한다. 김육의 유언이 대동법 시행의 확대라고 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작은 비문 하나에서 한 나라 경제발전의 큰 역사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념비가 있는 바로 옆 조그마한 동산에 올라서니 소사벌의 너른 농토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소사들이다. 너른 들판에서 곡식이 자라 그 쌀이 모여 유천리와 군문포를 지나 한양까지 운반됐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2월 평택역사 둘레길 걷기에서 세금으로 걷은 세곡을 실어 나르던 나루에 대한 김해규 선생님의 설명이 기억난다. 고덕면 해창·팽성읍의 경양창·청북면의 옹포가 그 곳이라 했다.
교통수단의 하나인 배가 바다의 운송수단으로 확대되며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경제가 발전하며 사회적 연결망의 변화 확대가 있었으리라는 나의 추측은 억지가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충남 아산의 신창으로 출발했다. 김육비(金堉碑)가 있는 곳이다. 기념비는 신창초등학교 주차장에 위치해 있다. 현종 원년에 김육이 대동법을 주창·시행한 것을 송덕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충청지방의 대동법은 효종 2년(1651년)에 실시됐다. 김육을 기리는 이 비 옆으로 여러 공덕비가 같이 세워져 있다. 그것들은 원래 그 위치에 있던 것이 아니라 주변에 따로 있던 것을 한 곳에 모아놓았다고 하는데 하나같이 시멘트로 바닥을 처리하여 세워 놓고, 풍화작용을 막아 줄 지붕도 없이 관리되고 있었다. 길라잡이 김일 선생님은 이를 이름하여 일명 ‘문화재의 공구리(콘크리트) 관리법’이라고 했다. 문화재의 관리가 이렇게 되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곳 아산에 비해 평택의 문화재는 그나마 잘 관리되고 있다는 자부심 아닌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
초등학교 입구 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충청도에서 홍성과 신창 두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척화비가 나온다. 이 척화비도 한번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가 본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기념비나 문화재를 보존하는데 있어 원본이나 장소의 중요성은 후대에게 역사의 연혁을 알려주는 지표석이라 할 수 있다. 과정 과정마다 신중하게 기록을 남겨 역사를 기억하고 상상하고 유추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놓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공세곶고지’다. 내심 여기까지 오면서 평택역사를 알기위해 참가를 했는데 왜 충청도까지 가야하나 의아해 했으나, 선생님의 설명으로 하나하나 이해되기 시작했다. 대동법의 시행은 미곡(쌀)의 운반을 위해 물길을 이용해야 했다. 평택은 물길건너 인접한 아산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을 가진 도시이다. 이곳 공세곶고지는 1523년(중종 18년), 80칸의 창고에 경기남부와 충청지역의 공세미(貢稅米)를 보관했던 곳이다. 길가에는 공덕비와 더불어 삼도해운판관비가 있다. 지금은 축조한 성지(城地)가 일부만 남아 있어 창고터라고 알아 볼 정도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해운판관비 앞이 마을쓰레기를 모아놓는 집하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또다시 문화재 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공세리 성당으로 이동했다.
1922년에 완공된 충남 최초의 본당인 공세리 성당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곳인 만큼 아담하면서도 정말 예쁘다. 아름드리나무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역사를 보여주는 듯 하여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곳에 성당이 세워지기 전에는 공진창(貢津倉)이라는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39개 목·군·현(牧·郡·縣)의 것을 납고시켰다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는 곳이었다. 마을에서 연결된 성당 반대쪽은 쌀을 운반할 수 있는 물길이 있었다고 하는데 간척으로 인해 논과 밭으로 사용되고 있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성당입구에 창고터임을 알려주는 토담과 경내의 큰 나무가 운반작업을 하던 일꾼들이 땀을 식히는 휴식공간이었다는 푯말로 공진창임을 알 수 있었다. 나뭇잎이 무성해 지고 철쭉이 활짝 피면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그리고 그 성당 아래에 퇴적층이 된 선조들의 삶과 애환도 되새겨 보면 좋을 것 같다.
오늘 둘레길 걷기에 참가하면서 우리 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통해 민생정치를 실현하는 훌륭한 경제학자를 만나게 되었고, 조세개혁으로 인한 역사적 의의와 대동법시행기념비가 왜 소사동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풀 수 있었다.
한편 뱃길 따라 연결된 당대의 사람들이 느꼈던 대동법은 어떤 의미였을지, 뱃길로 쌀을 운반하며 경계 짓지 않고 흐르듯 지나고 들르고 합쳐지는 곳에서 당대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사회연결망은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지 더더욱 궁금해진다. 웅장한 건축물, 영웅호걸의 출생이 아니더라도 여기에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평택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다음 일정도 기대되는 이유이다.

 

▲ 한정은 주무관/평택시 총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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